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용기

by 정상가치
"또 내가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똑같이 생각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레이 달리오, <원칙>


세계적인 투자자 레이 달리오의 이 문장은 오랫동안 제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인이 틀렸다고 확신하며 살아갈까요. 그 믿음이 얼마나 많은 관계에 균열을 만들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지 모른 채 말입니다. 과거의 저 또한 그랬습니다. 특히 교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저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 심판자와도 같았습니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에는 '가르강튀아의 침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인 가르강튀아는 사람들을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몸을 늘리고 크면 다리를 잘라 길이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제게도 그런 침대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향한, 어쩌면 세상을 향한 저만의 완고한 기준이었죠.


과거의 저는 왜 그토록 쉽게 분노했을까요? 그 원인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제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네 가지 편견이 보였습니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나태함,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불성실함,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무책임함, 그리고 어른에 대한 예의 없는 태도. 이 네 가지는 제 '침대'의 규격이었고, 여기에 맞지 않는 모든 학생은 잘못된 존재로 규정되었습니다. 제 분노는 당연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싫어함' 속에서 저는 교사라는 직업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 결론 내렸습니다. 이 길을 떠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레이 달리오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고의로 비생산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며, 각자의 뇌와 사고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생리적인 차이라는 사실은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일부러 저를 화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들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옳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학창 시절, 몸이 약해 지각을 밥 먹듯 했던 제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시절을 잊듯, 저는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그 아이의 삶에 있을 수 있고, 학원 숙제에 치여 학교 과제를 못 할 수도 있으며, 서툰 친근함의 표현이 제게는 예의 없게 보였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학생들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학생들 역시 저를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이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제 인생의 정답이 그들의 삶에까지 정답이 될 의무는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한 이웃 블로거님과 자녀 교육에 대해 댓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과 다른 의견에, 저는 책에서 읽은 지식을 동원해 그분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결국 그분께서 어른스럽게 제 의견을 수용하는 듯한 답을 주셨고, 저는 제가 옳은 길을 알려주었다는 생각에 우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순간이 얼마나 오만한 행동이었는지 깨닫습니다. 그분의 삶에서는 그분의 방식이 정답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내리는 수많은 판단이 결국 '가르강튀아의 침대'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직급이 높다고, 부모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내가 옳다고 믿었던 일이 오늘의 내게는 틀린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섣불리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작은 가능성을 마음 한편에 두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너그러워집니다. 이 생각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끝없이 성장하게 만듭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설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정상가치'라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며 변해가고 있구나, 라고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오늘 제가 쓴 이 글도 틀린 부분이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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