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비싸다.

by 정상가치

욱신거리는 오른손. 벌어진 생채기. 틈새로 보이는 붉은 후회.


‘오늘도 참지 못 했어.’ 수업이 끝났지만 교실에 내 자리는 없다. 벗어나고 싶었다. 보건실에 가야 한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나가며 옆반 아이들이 인사를 한다. 최대한 빠르게 지나쳤다. 여유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이 좋았다. 이럴 때 날 구원해 주는 건 책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는 무서웠다. 적막함이 두려웠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책이 많은 공간은 편안함을 줬다. 내게 책은 구원이었다. 아늑함이었다. 집에서 받지 못 한 사랑이었다. 도서관이 마냥 좋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이상하다. 생글거리는 젊은 선생님이 아니다. 할아버지. 푸근한 미소.


그제야 생각이 난다. 교직원 회의 시간. 육아휴직에 들어간 사서 선생님. 대신 봉사를 하러 온 시니어 봉사자. 3차 공고까지 올렸는데 아무도 지원을 안 했다는 교감선생님의 푸념. 교통편이 안 좋은 학교라서 그런가.


눈이 마주칠까 서둘러 창가 쪽 구석에 앉았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교사용 도서가 꽂힌 서가. 멍하니 앉아있었다.


차갑게 식은 기분에 문득 두려워진다. ‘또 민원 전화를 받겠네.’ 이러려고 교사가 된 건 아니었는데. 하하 호호 웃으며 행복한 교직 생활을 꿈꿨다. 존경까진 아니어도 사랑받고 싶었다. 그랬었다.


“분노는 아주 비싸지, 남준 선생. 그렇게 막 쓰면 바닥이 난다네.”


고개를 들어보니 갈색 슬리퍼, 회색 양말이 보였다. 빳빳하게 다려진 바지, 체크무늬 타이. 백발이 잘 어울리는 키가 훤칠한 노인.


평소 교직원 명찰을 차지 않는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오른손이 화끈거린다. 그가 건네준 물티슈가 따갑다.


망설이다 그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갈라진 목소리. 낯설다.


어쩔 수 없이 교실로 돌아오는 내 손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미움받을 용기라니. 미움받는데도 용기가 필요한가. 우습다.


퇴근길. 학교 근처에 있는 원룸. 친구가 없어서 항상 집에만 있던 내게 방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집. 아무도 잘 다녀왔냐고 인사해주지 않는 집.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두려워했던 빈집.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평소 같았으면 오자마자 TV부터 틀 텐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평소처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막연한 기대.


배달앱으로 양념반 후라이드 반 치킨을 주문한다. 퇴근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온 책 한 권. 자세히 보니 모서리가 접힌 부분이 보인다.


“도서관 책이 아닌가?” 혼잣말이 익숙하다. 책의 밑줄까지 그어져 있는 걸 보니 시니어 봉사자 분의 책인 것 같다.


“자네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지. 다시 말해 큰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 걸세.”


뭐라고? 내가 일부러 분노라는 감정을 만들어냈다고?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고 내 말을 무시하는 건 아이들인데?


규칙을 어긴 것도 아이들이고, 내 말을 무시한 것도 아이들이다.


교탁을 세게 내리쳐서 주먹에서 피가 나고 멍이 들었다. 그런데도 내 탓이라고?


화가 난다. 교사로서의 권위를 위해 내 분노는 정당했다. 난 틀리지 않았다.


책을 덮으려 했다. 그러자 멍든 오른손이 내게 말을 건다. 진실은 아프다고. 눈을 돌리지 말라고.


그렇다.

난 값싼 방식으로 아이들을 굴복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겁을 주고 싶었다.

내 권위를 드러내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는 쉬운 길을 택했다.

그랬다. 내가 그랬다.

5년 차 교사 김남준. 그게 내 본심이었다.


“분노는 아주 비싸지, 남준 선생. 그렇게 쓰면 바닥이 난다네.” 도서관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맴돈다.


값비싼 분노를 사기 위해 팔았다.

교사로서의 권위,

아이들의 신뢰,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존중까지.


아프다. 문밖에 있을 차가운 치킨처럼. 내일 출근할 생각에 한숨을 쉰다.


내일 쉬고 싶다.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