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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y 25. 2023

영국 소설 속 그 많은 독신남과 독신녀들

끄적끄적

어릴 때 동화로 읽은 <해저 2만 리>는 흥미진진했다.

그들의 험난한 모험이 무서우면서도 나도 그 자리에 낀 양 가슴이 콩닥거렸지.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세계에 대한 꿈을 키워주었다.

비슷하고도 다른 세상, 나도 세계 곳곳을 다니고 싶었다.


이들 소설을 쓴 쥘 베른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살다 간 작가인데,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주인공은 영국 사람으로 그 출발지는 런던이다.

런던의 한 클럽에서 교양 있는 신사들이 발전된 과학, 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계일주 가능성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리고.

직접 해보면 답이 나오겠지- 하면서 출발했던 거다.

독신남이니 가능했겠지.



18, 19세기 영국 소설에는 중년의 독신남들이 종종 등장한다.

시골 영지에서 넉넉한 전원생활을 즐기는 중년 독신남이 있고.

늙은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과 함께 사는 독신 사제도 있다.

클럽 문화가 번성했던 런던에서는 일과를 마친 신사들이 그들만의 클럽에 모여 혼자 또는 여럿이,

식사하고  마시며 신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찰스 디킨스의 <픽윅클럽 여행기>도 클럽에서 만난 사람들이 클럽 활동으로 시작하는 여행기였다.

모두 중산층 이상의 독신남들이었지.

찰스 디킨스의 모든 소설에는 유복한 중년 독신남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면서 공명정대한 처신으로,

어려움에 놓인 사람들을 돕고 공공의 이상에 힘을 보탠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뿐만 아니라 19세기 유럽, 특히 영국 소설에는 넉넉하게 사는 독신자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오랫동안 독신남으로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년신사가 뒤늦게 나이 차이가 큰 어린 미녀와 결혼하는 경우는 흔하고.

장자가 아니라서 재산을 물려받지 못해 태어날 때의 신분과 현실의 간극에서 고뇌하던 차남 이하 독신남이,

나이가 들어서야 사망한 친척으로부터 재산과 위를 물려받는 사례도 있다.

돈을 벌겠다고 고향을 떠나 혼자 식민지에서 고군분투한 남자는 재산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고급 저택을 마련하여 집사와 하녀를 고용하는 신사다운 생활을 누리기도 한다.


독신녀들도 많이 보인다.

특출 미모가 아니고,

지참금을 들고 갈 형편이 아니어서 평생 부모의 집과 남자 형제의 집에서 살림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독신녀도 있고.

제인 오스틴처럼 젊었을 때 몇 번 결혼 기회를 스스로 흘려버리고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면서 몰래 소설을 쓴 경우도 있다.

샬롯 브론테처럼 생계 문제를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하다가 뒤늦게 결혼할 사람을 만났지만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몇 년을 기다려야 했던 경우가 있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미스 마플처럼 물려받은 재산으로 평생 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공의 인물도 보인다.


교육받은 중산층 이상에만 독신자들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영화에 근사한 차림새로 등장하는 귀족 집안의 집사들은,

주인집 생활을 도맡은 사생활이 없업무 성격 상 독신이 많았다고 한다.

집안에서 마주치는 젊은 하녀들이 많았지만 사내연애는 금지라서 연애하고 결혼에 이르기는 쉽지 않았다고.

(물론 같은 집안의 하녀와 결혼해서 영지 안에 있는 집을 제공받고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부엌살림을 총괄하거나 주인마님 곁에서  일상을 돌보는 하녀도 결혼이 쉽지 않았다.

결혼을 하려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하녀 중에서 상당한 수입과 지위를 얻은 주인마님 전속 하녀의 경우 일종의 골드 미스여서 그 생활을 박차기가 쉽지 않았단다.

평생 고된 노동을 하면서 생계 기반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못' 하는 경우가 물론 더 많았다.

긴 노동에서 잠깐 벗어나 펍에서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고달픔을 달래고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 떠난다.



결혼은 사랑한다는 감정과 생활이라는 현실, 더해서 가치관과 꿈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요구되는 '운명'이라서.

특히 재정적인 요인이나 신분, 본인이 바라는 인간형의 간극, 생활 감각 등 여러 가지 고려 사항들을 수렴할 인물을 만나지 못하면 굳이 다급하게 결혼할 이유가 없겠으니.

생활을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고,

친분을 나눌 클럽이 있으며,

취미생활과 생각을 함께 할 이웃들이 있는 조건에서는 독신으로 살 만하다, 싶었겠지.


실제로 19세기 영국 인사들의 결혼 상황을 보면 물론 대다수가 그리 늦기 전에 엇비슷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나이 들어서 미인이나 명문가 출신과 결혼한 경우도 적지 않고.

우리와 다른 점은 전남편과 사별 또는 이혼한 여자들과 결혼하는 초혼남이나,

나이 차이가 큰 연상 연하 결혼이 희귀하지 않더라.

소설 속에서처럼 자신이 일하던 근무처의 사장이 죽은 뒤에 그 재산을 상속받은 미망인 또는 딸과 결혼해서 그 사업체를 계속 꾸려가는 경우가 있었고.

모시던 윗분이 돌아가신 뒤 한참 연상인 그 부인과 결혼 한 유명 정치인도 있었다.


나는 이런 게 재미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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