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쌀독을 들였다.
연이어 택배가 도착하고 1톤 트럭으로 짐이 들어왔던 어수선한 며칠 동안,
은이는 식당에 가거나 레트로트 식품으로 식사를 해결했는데.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갖춰져서 오늘 저녁부터는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 사더라도 제대로 만든 걸 '들이라',
-살림 도구는 필요한 쓰임새가 있는 생활의 동반자라는 의미에서 할머니는 단지 물건을 '산다'의 단계를 넘어 꼭 '들인다'라고 표현하셨다-, 시던 할머니 말씀을 떠올렸지만.
충분치 않은 예산으로 한꺼번에 살림살이 일체를 장만해야 하는 형편에서 질 좋은 것만 고를 수는 없었다.
당장 필요한 것들만 최소한으로 장만했는데,
음식 관련한 품목만 봐도
요리할 기본적인 식재료들과 갖가지 양념은 갖춰야 했고,
음식을 떠먹을 그릇과 수저가 있어야 했으며,
간단하게라도 조리를 하려면 냄비, 프라이팬과 주전자에 믹싱볼, 채반에 더해.
재료를 담아둘 밀폐용기와 그릇을 받칠 쟁반과 설거지할 수세미와 고무장갑까지 일일이 사야 했으니.
무심히 여겼던 살림살이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 거였다.
아무리 잘 씻어도 늘 쓰는 도구에는 알게 모르게 음식 냄새와 맛이 배기 때문에 되도록 용도 별로 조리도구를 구분해야 한다고.
사정이 안 되면 밥솥이라도 꼭 따로 쓰라던 할머니 말씀을 기억해 은이는 작은 밥솥을 골랐다.
또 플라스틱이 아닌 쌀 담을 용기를 계속 찾다가 쌀독으로 쓸 만한 뚜껑 있는 옹기 항아리를 찾아내 오늘에야 들일 수 있었다.
너는 오늘부터 우리 집 쌀독이야, 밥상을 든든히 지켜줘- 부탁하고는,
깨끗이 씻어 말려서 쌀을 가득 부었다.
밥은 우리 밥상의 근본이라 여기셨던 할머니는
쌀과 콩, 보리, 팥, 흑미 같은 갖가지 곡식을 각각 담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항아리들을 부엌 선반에 나란히 갖춰두셨었다.
은이도 할머니의 그런 부엌을 갖고 싶지만 지금은 꿈일 뿐, 언젠가를 기약하자.
은이가 먹는 일에 유별나게 된 데는 솜씨 좋은 할머니 몫이 크다.
할머니는 꼬박꼬박 뜨끈뜨끈한 밥을 지어,
끼니마다 바뀌는 맛깔난 반찬들과 국으로 할아버지와 은이를 위한 세끼 밥상을 차려내셨다.
일 년 열두 달,
사시사철,
20년 동안 그렇게 성실한 밥상에서 조부모와 손녀, 세 식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밥을 먹었고.
한없는 할머니의 정성과 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은이는 쑥쑥 자라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은이더러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할머니가 없게 되더라도 밥을 허투루 먹으면 안 된다고,
할머니가 차려주는 것처럼 혼자라도 꼭 정성 들인 밥상을 차려먹어야 해, 당부하셨지.
학교에서 돌아와 내내 부엌 정리를 한 은이는 저녁밥상을 준비한다.
옹색한 부엌에서 달랑 1구짜리 인덕션으로 순서를 기다려 하나씩,
모자라는 도구를 연신 씻어가며 만들어낸 음식은-
갓 지은 밥과 맑은 소고기뭇국,
소 불고기에 대구전과 하얀 도라지 볶음이다.
침대와 책상과 책장, 행거와 가림막으로 꽉 들어찬 방 한 귀퉁이에 접이식 상을 펼쳐 음식들을 차리고,
물컵 하나,
수저는 여섯 벌을 올린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만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의 마음과 생각, 어느 정도의 재능,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내가 믿는 가치관에 따라 실행해 온 행위,
그렇게 살아온 지난날과 지금 이 순간에 더해 나의 앞날에 기대하는 꿈과 포부- 이런 것으로 구성되는 '나'라는 존재로만 말이다.
내게 어떤 상표를 붙여서 '나'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위나 소속, 직업과 재산으로 나를 규정하지 않겠다.
아무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혹성에 홀로 떨어지더라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여전히 속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해 갈팡질팡 하는, 말과 행동이 엇갈리는 모순투성이였지만.
언젠가는 내가 성숙한 인격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미리부터 자부심을 느꼈다."
책에는 또 이런 구절도 있었다.
"내가 어떤 조직이나 신분에 속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내가 변형될까 두려웠다.
철광석은 펄펄 끓는 용광로에 끌려들어 가 쇳물이 되고,
쇳물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똑같은 모양과 쓰임새를 가진 도구로 만들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율적으로 폭과 깊이를 확장하며 성장해가고 싶었지 바깥에서 누르는 힘으로 변형당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순수하게 '나'라는 존재가 나의 자유의지 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내면과 외부 환경이 매 순간 부딪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율하고 타협하고 극복하고 포기하는 결과로 일정 시점의 내가 이루어지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결국 운명이라 불리는 지극히 제한된 범주 안에서의 발버둥일 뿐이라서 아주 약간의 판단과 선택만 허락된다 해도, 나는 그 약간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은이도 자신이 납득하지도 동의하지도 않는 것에 휩쓸려서 살아가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외부의 힘에 질질 끌려다니는 인생은 단호히 거부한다고 진즉에 마음먹었다.
은이는 자신이 좋아하면서 잘할 수 있고,
동시에 의미 있다고 믿어지는 어떤 일을 하고 싶었다.
마음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어떤 것,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안개 같은 무언가는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은이는 그것들을 끄집어내어 분명한 형태를 갖춘 무엇인가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한번 해보자.
하다 보면 답을 보이겠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그저 '나'일 뿐으로 살아가면서 은이는 무언가를, 또렷이 떠오르는 어떤 의미를,
반드시 찾아내자고 마음먹었다.
늦은 저녁
은이는 밥상 앞에 앉아,
죽음을 무릅쓰고 딸을 구한 아버지 어머니와,
노년의 시간을 손녀에게 헌신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를 초대한다.
집들이예요.
덕분에 이만큼 자라서 스스로 집을 꾸리게 됐어요.
기특하죠?
나는 어른이니까,
살아가면서 어떤 시련이 닥치고 나쁜 상황에 놓이더라도 칭얼거리지 않을 거예요.
정직하고 씩씩하게 내 삶을 살아낼게요.
은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할아버지는 그날의 사고를 전하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매일매일 자신의 생명을 덜어주고,
자식은 부모가 나눠주는 그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거야.
네 부모는 그 과정이 순간으로 압축되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해 주셨다.
책에는 "자식은 부모의 무덤 위에서 자라는 나무",라는 글귀가 있었다.
자식은 부모의 생명을 딛고 자랐을 터였고,
부모 또한 그 부모의 목숨을 거름으로 자라났을 거였다.
그렇게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을 거듭하였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생들이 차곡차곡 쌓여 내가 태어나고 자랐겠구나.
대대로 이어온 부모 된 자들의 누적된 무덤 위에서 자라난 '나'라는 나무는,
번쩍번쩍 치렁치렁한 겉치레로 모자란 존재를 꾸밀 것이 아니라,
오직 본질에 치중해서 존재 자체가
깊이 뿌리내리고 굵은 줄기를 키워 무성한 이파리를 넓게 드리우는 튼튼한 나무가 되겠다고.
은이는 오늘,
천국에서 내려와 주었을 다섯 분께 약속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