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양손에 들고 커다란 배낭을 멘 여자가 언덕길을 올라간다.
붉은 벽돌의 공동주택들이 가득 들어찬 가파른 언덕.
자동차들이 넘실거리는 큰 도로들로 에워싸인,
마치 강줄기 사이에 낀 모래톱 같은 이 볼록한 언덕은
꼭대기까지 빈틈없이 건물들로 덮여 있다.
변변한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빠듯한 대지를 꽉 채운 단조로운 건물들로 촘촘한,
오직 씻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동네.
휴, 은이는 걸음을 멈춰 양손의 가방을 바꿔 들고는
골목 양쪽을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언덕 끝, 좁은 골목에 다다라
담벼락을 돌아서 어설프게 닫혀있는 유리문을 밀고,
다시 계단을 올라 뽕, 뽕, 뽕, 뽕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연다.
이 기록에서 은이는 대학 졸업을 앞둔 스물네 살 여자인데.
사실 은이는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있고,
갓 성인이 된 조그만 아이거나,
세파에 시달리는 중년이거나,
기력이 떨어진 은발의 노인일 수도 있다.
자발적이거나 떠밀려서나 어쨌든,
홀로 세상을 마주하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겠지만.
은이는 가족관계증명서 상 단독자가 된 상태에서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적으로도 -최소한 당분간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로지 은이 자신으로서만 살아보겠다 마음먹었고.
그러니 서툰 솜씨로 스스로 일상을 꾸리고,
어리숙한 그대로 세상이라는 험한 바다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
어떤 위치에서
어떤 태도로
뭘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지,
내내 고심하고 갈등하겠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막막함 속에 은이는 우선 몸을 깃들일 조각배 같은 집을 빌렸고,
이제 그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은이는 집에 들어선다.
좁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가방에서 꺼낸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실내에 들어서자
곧 냉장고와 전기레인지, 전자레인지가 갖춰진 일렬의 부엌 시설이 있고.
그 안쪽으로 샤워시설과 세탁기가 있는 화장실이 나온다.
부엌을 지나 드르륵 미닫이문을 밀면 방이 있지.
비교적 너른, 길쭉한 방.
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 나간 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방은 그러나 제법 환해서.
정면에는 두 쪽짜리 창문이 있으며
왼쪽 벽에는 거의 천정에서 바닥까지 내려오는 두 쪽으로 된 미닫이 유리문이 있다.
원래는 외부로 개방된 베란다였을 유리문 바깥 공간은 경사 급한 골목에 면해 있는데,
유리와 새시로 막아버려서 실내도 실외도 아닌 엉거주춤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는 빨래가 말라가고 물건들이 되는대로 쌓여있는, 어둑어둑한 창고로 보였지.
등에서 배낭을 내려 가방들과 함께 비어있는 싱크대 아래칸에 넣어두고,
외투를 벗어 가방 위에 얹는다.
방으로 들어간다.
불투명한 안쪽 창문과 투명한 바깥 창문을 차례로 활짝 연다.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반쯤 열어 타일로 처리된 때 묻은 바닥에 내려서,
시커멓게 먼지가 고여있는 창틀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베란다 유리창도 활짝 열어 놓는다.
용케도 햇빛이 들어오는구나.
볕 좋은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파아랗고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예년 이맘때보다 날이 푹해서 늦은 가을 같지 않은 청명한 날씨.
동네는 조용하다.
집 구할 때 중개인이 말하길,
이 동네 주민들은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라서 낮에는 다 밖으로 나가니 사람이 안 보인다고,
막다른 이 집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더 조용할 거라고 말했다.
온 집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빗자루로 두 번, 걸레질 세 번.
방, 부엌, 화장실에 베란다까지 몇 번이고 왔다 갔다 집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벽과 바닥, 유리창과 방충망, 세면대에 선반과 창틀까지 꼼꼼하게 닦아낸다.
방에, 화장실에, 부엌에도,
이곳에 살다 간 사람들의 자국을 완전히 벗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집이 훨씬 말끔해지자 마음이 놓인다.
은이는 어둠이 다가와 썰렁해진 기온에 어깨를 떨고는 난방을 켜고.
샤워하고는 옷을 갈아입는다.
그 사이 현관 앞에 배송된 접이식 앉은뱅이 테이블과 휴지와 물을 낑낑 들여놓고.
깨끗이 닦은 냉장고에 물을 몇 병 채우고
물 한 병은 컵에 덜어 쭈욱 들이켜지.
대용량 두루마리 휴지 포장을 뜯어 화장실 선반에 휴지 몇 롤 얹어두고.
행주로 닦은 접이식 테이블은 우선 방에 펴놓자.
가방에서 침낭과 베개를 꺼내 방 한 구석에 개켜둔다.
배고파, 나가서 먹을 것을 사 와야겠어.
은이는 그렇게 새 집에서 첫날을 보냈다.
따뜻한 방바닥에 침낭을 깔고 드러누워서 몇 가지 물건을 더 주문하고.
살 집을 알아보면서부터 읽어온 책을 다시 들추면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에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불빛으로 어슴푸레한 방을 둘러보았는데,
낯설기는 하지만 무섭지는 않네.
괜찮아...
토닥토닥.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자 휴대폰을 확인하고 팔, 다리를 쭈욱 뻗었다가 당겼다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가을날의 아침은 상쾌하고 은이는 바깥을 비추는 햇살을 방 안으로 맞아들인다.
현관문을 열어 새벽에 배송된 식품들을 들여놓고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사과는 빡빡 씻어서
접이식 테이블 위에 간단한 아침상을 차렸고.
설거지를 마친 뒤 긴 머리를 묶고 가방을 둘러멘 은이는,
통통통, 언덕을 뛰어 내려가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사 쪽쪽 마시면서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은이가 몸에서 실을 자아 고치를 지어내는 꿈틀꿈틀 애벌레처럼.
혼자의 집을,
자신의 세계를 차근차근 이루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잘 해내라고,
짝짝짝, 응원해 주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