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차근

은이의 작고 예쁜 집

by 기차는 달려가고

짐을 정리하다 말고 은이는 침대에 벌렁 누워버린다.

방에는 물건들이 잔뜩 흐트러져 어수선하기만 한데

그 어지러운 풍경을 외면하고 은이는 돌아눕는다.

도무지 답이 안 보여.

가구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이며,

물건들을 어디에, 어떻게 넣어야 보기에 깔끔하고 쓰기 편리할지, 막막해졌던 것이다.


작업대로 쓰는 커다란 책상과 여섯 단의 책장, 문이 두 짝인 옷장과 거, 침대.

그 안에 담길 옷과 책과, 작업물들과 생활용품들을 이 공간 안에 대체 어떻게 정리해야 한단 말인가.

방이 넓은 편이라서 기능에 따라 공간을 구분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구를 들여놓고 보니 문들과 창문, 길이와 넓이라는 여러 조건으로 공간 구성이 쉽지 않다.

가구 배치보다 먼저 물건들을 분류해야 해.

검은색 단프라박스들에 들어있는 물건을 다 끄집어내서 펼쳐놓아야,

버릴 것, 계속 보관할 것, 꺼내놓고 쓸 것들을 구분할 텐데.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해외의 대학교 기숙사에서 혼자 지낸 경험이 있고.

이사 나오기 전까지 원룸이나 tiny house 같은 작은 사례를 틈틈이 찾아보았다.

캠핑카에 가재도구를 싣고 몇 년이고 여행하는 장기여행자도 드물지 않아서,

좁은 공간이라도 심지어 동거동물까지 함께 잘 더라.

그래서 은이도 단순하게 살면 정도 공간에서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나름대로 집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

물건으로 꽉 찬 답답한 공간은 만들지 말자, 라든가.

쓰던 가구들이 다 원목제품이니 자연스러운 톤으로 소박하고 정돈된 방을 만들자, 하는.

하지만 캐리어 두 개에 물건을 담은 교환학생의 경험과 장기적으로 살아갈 집을 꾸리는 달랐다.

좁은 공간이지만 생활하면서 작업도 하려던 은이의 계획은 무리였던가?


책에는 집에 관한 이런 글귀 나온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과,

많은 사람들이 실내공간이 거의 전부인 아파트에 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실내장식에 관심이 높아졌다.

큰집은 큰 대로, 작은 집은 작은 대로 인테리어와 관련된 콘텐츠가 넘쳐나고,

다들 실내 구조와 장식, 설비들에 관심이 커 보인다.

트렌드라는 일률적인 유행으로

고가의 주택,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와 작가의 미술품을 배치하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소비자의 마음을 흔들고.

우리는 은연중에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면 멋진 집을 가질 것이라 여긴다.

과연 비싸게 구입한 집과 가구가 있으면 내가 진정 원하는 집의 내용인 sweet home을 가질 수 있을까요?"


글은 이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집은 보금자리라는 심리적 안정감과 실용성을 벗어나 재산 증식 수단, 재산 능력을 과시하는 정체성의 표현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집은 경제력만이 아니라 생활 방식, 감각과 가치관, 관심과 수고와 비용 같은 거주자의 거의 모든 부분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다.

비용 지불 능력에 따라 선택지는 달라지겠지만,

현실이라는 좁은 재량권 안에서 최종적으로는 거주자의 생활방식과 가치관과 감성에 걸맞은 집과 가구가 선택되고 배치되며,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집과 가구는 전시품이 아니라 지극히 실용적인 일상의 공간, 생활의 장소라서

거주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따라 같은 집, 같은 가구라도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집은 거주자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알차게 살아보겠다는 또랑또랑한 의욕으로 충만해 집을 아끼고 사랑하여 수고를 쏟으면서 세심하게 보살피면 집은 반들반들 윤이 난다.

마음이 어수선하면 집은 곧 방치되어 황폐하고 음울한 공간이 된다.

그렇게 집 상태가 어느 정도 거주자 내면의 표현이듯,

사람을 둘러싼 일상의 환경 또한 사람 내면에 깊이 영향을 미칠 터이니.

집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집의 풍경이 거주자의 심리를 움직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내 마음의 괴로움으로 집이 황량해질 수 있지만,

억지로라도 애써 깔끔하고 화사하게 살림을 꾸려간다면

힘든 마음을 추스르는데 도움 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겠다."


물건과 공간과 생활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를 이루고 그 집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리라.

치우고 가꾸며 먹고 살아가는,

살림이라는 일상의 충실함이 집이라는 거주환경의 질을 형성하고.

그렇게 관심과 수고를 쏟아내는 시간의 흐름으로 집과 사람은 밀착되어,

안전하고 평화로운 거주자의 보금자리가 되어갈 것이다.



시도와 실망, 궁리와 노동의 며칠을 보낸 뒤 은이는 드디어 방 배치를 끝냈다.

꼼꼼하게 마지막 손걸레질을 하면서 은이는 방을 둘러본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베란다에 면해 있는 벽은 작업용 책상과 책장이 거의 차지했고.

침대는 우드블라인드를 친 남쪽 창문 옆에 두어서

아침에 일어나 윗몸을 일으키면 창을 열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옅은 하늘색 체크무늬 코튼 이불보가 덮인 침대 옆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각각 쓰시던 낮고 긴 서랍장 두 개를 붙여두어,

다른 공간과 구분하는 아늑한 잠자리를 만들어냈다.

수십 년, 안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소지품이 들어있던 낡은 서랍장은,

할머니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방의 가구와 배치를 모두 바꿀 때,

고모가 버린다는 걸 은이가 할아버지, 할머니 기념으로 자기 방으로 옮겼던 거였다.

이제 서랍 안에는 더운 계절을 기다리는 은이의 얇은 옷들이 얌전하게 개켜져 있고.

서랍장 위에는 전기스탠드, 공기청정기, 태블릿과 블루투스 스피커와 자잘한 일상용품을 넣은 바구니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잠자리와 활동공간을 구분하면서 깔끔하게 수납도 해결됐으니, 은이는 흡족하다.

당장 입는 계절 옷들을 걸어놓은 거는 방구석에 두어 옷장과 철망 가림막으로 슬쩍 가리고,

그 옆에는 외출하면서 옷차림을 볼 수 있도록 긴 거울을 세워두었으며.

가림막 안쪽 철망에는 가방, 모자, 목도리 같은 소품들을 걸어두었다.

방에 식탁을 두면 공간이 빠듯해지니 일단 접이식 상을 부엌 쪽 출입문 가까이에 세워두어서,

귀찮더라도 밥 먹을 때마다 음식을 들고 방을 들락거릴 수밖에.


어릴 때부터 은이는 목욕탕에 수건을 넉넉히 두고서 한번 쓰고 나서는 곧 빨래거리로 내놓았다.

또 기초화장품과 속옷, 드라이어도 목욕탕 수납장에 두어 샤워를 하고 기초화장까지 목욕탕에서 마쳤었는데,

이 집은 목욕탕 수납장이 좁고 얕아서 휴지와 세면용품, 세제 몇 가지에 차고 말았네.

그래서 3단짜리 트롤리를 목욕탕 출입문을 열면 바로 손이 닿는 곳,

부엌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두고 얇은 수건들과 기초화장품, 집에서 입을 옷들을 차곡차곡 담아 두었다.

그 옆으로 빨래 바구니를 두어 세탁할 빨래들을 종류 별로 각각 분류해 넣을 것이다.


거리가 많았던 베란다도 고심 끝에 일단락되었다.

넓은 창에는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길쭉한 벽에 딱 붙여서 스피드랙을 설치해 당장 쓰지 않는 물건을 넣은 단프라박스들을 층층이 얹었다.

천정 가까이 높은 벽에는 돌돌 감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잡아당기는 와이어 빨랫줄을 두 개 설치하고,

묵은 때가 들러붙어있던 타일 바닥은 몇 번이고 닦아서 조립식 마룻바닥을 깔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바닥 냉기를 막아줄 도톰한 깔개를 마루 위에 덮고,

작은 접이식 나무 테이블과 나무와 캔버스 천으로 만든 의자를 두었다.

베란다가 동쪽 방향이라 아침에만 해가 들지만

집에서 작업하는 은이가 종일 실내에 있어 기분이 답답해질 때,

문 열고 나가 바깥을 바라보고 앉아있을 곳이 절실하니.

실외는 아니지만 실내도 아닌 이곳이 은이의 휴식공간이 되어주겠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을 올라오거나

도심을 횡단하는 간선도로 중앙차선에서 버스를 내려 가파른 언덕을 걸어 닿게 되는 이 작은 집은,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쳐가는 은이의 조각배가 되었다.

책상은 은이가 작업에 몰두할 조타실이 되겠고,

침대는 안심하고 잠들 선실이 될 것이며,

베란다는 갑판이 되어 솔솔바람 맞으며 차 마시는 휴식처를 내어주겠지.


한없이 파아란 바다에는 무작정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때로 풍랑이 일어 큰 파도가 출렁이겠지만.

한결같이 은이를 담아줄 작고 예쁜 ,

언덕 위 든든한 이 방주에 담겨서.

은이는 밤하늘을 빛내는 별들로 방향을 가늠하며

조금씩 조금씩 꿈꾸는 그곳을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신나게,

즐겁게,

은이가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전 02화쌀독을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