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대하는 자세

은이의 작고 예쁜 집

by 기차는 달려가고

날이 추워지면서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몇 달 동안 외부로 통하는 길이 사라지는 첩첩산중 외딴 마을이라든가.

홍수에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 넘실거리는 강물 저편에 혼자 남은 수도승이라든가.

여행길에서 본 언덕 위 겹겹이 돌로 쌓은 허물어져가는 성에서,

은이는 계절 고립되는 상황을 상상하곤 했었다.

온통 눈뿐인 하얀 세상에서 날이 가는지 오는지,

시간이 멈춘 나날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거센 물살이 모든 것을 삼키고도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그치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또는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적군에 둘러싸여 운명은 풍전등화.

어둠 속에서 피워 올린 봉화로 소식을 받은 아군이 밤새 말을 달려와 적군을 물리칠 때까지.

그래서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리고 식량이 들어오기까지의 불안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상황을,

어린 은이는 다락방에 갇힌 '안나의 일기'에 뚝뚝 눈물을 흘리며 그려보고는 했었다.


한파 경보가 발령되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추위가 지나가고 내내 기온이 평년보다 높았는데.

하룻밤새 10도 이상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져 강추위와 폭설이 며칠 속된다는 예보이다.

행정 당국은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라는 안전문자만 무작정 던져대고,

혼자 맞이하는 첫 한파에 은이는 걱정으로 마음이 부산스러워진다.

단독주택 살던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하셨더라?, 가물가물한 겨울날들을 떠올리면서

서둘러 물과 통조림을 주문하고.

가파른 언덕길이 얼어버릴까, 도서관에 들러 책을 여러 권 빌렸으며.

과일과 빵, 고기와 채소를 사 와서 작은 냉장고를 꽉꽉 채운다.

배수관이 얼어 빨래도 못하게 될까 싶어, 이불보와 시트, 베갯잇, 여분의 수건까지 매일매일 세탁기를 돌렸고.

구석구석 청소해서 걸레들도 하얗게 빨아 널었다.

뉴스에 보도된 어느 동네처럼 정전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보조배터리를 몽땅 충전해 두고.

가스 공급은 괜찮은가?, 근심이 밀려와서는.

나무를 땔래도 연통이 없고,

물을 받아올 샘이 없는 도시의 모래성 같은 생활환경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게 은이는 추위가 닥치기 전 도토리를 모아 땅을 파고들어 가는 다람쥐들을 떠올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룰렛이 멈춘다.

죽음, , 이별, 합격, 외로움, 만남, 사고, 불치병을 빠르게 지나 가난에서 멈춘 룰렛을, 다시 돌릴 기회는 없다.

이제 당신은 먹을 걸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몰라.

어쩌겠어요, 주사위는 던져진걸요.

이번에는 하늘에서 막연히 쏜 화살이 툭 떨어진다.

웃으며 길을 걷던 지상의 어느 목덜미에 사고라는 살이 날아와서 꽂혀버렸다.

평온한 나날은 끝났다.

따뜻한, 아니 너무 당연해서 따뜻한 줄도 몰랐던 아랫목에서 끌려 나와 당신은 비바람 몰아치는 들판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누구도 고난을 피해 갈 수 없다.

희망의 봄, 번영의 여름을 지나 결실의 가을을 지나면 죽음의 겨울이 오듯.

순서는 일정치 않고 기간이나 농도는 제멋대로지만,

또한 어째서 내가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인과관계나 연관성도 헤아리기 어려운데.

누구에게나 시련에 시달리고 고난으로 휘청이는 날은 반드시 온다.

매일매일 조금씩 주워 먹을 수밖에 없는 지리멸렬이라는 상시적인 시련으로 오기도 하고.

단박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파멸의 형태 거나.

당신이 고난의 종류를 선택할 권리는 없지."


읽던 책 이 구절에서 은이는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아들 내외의 죽음을 겪은 뒤에서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나라고 해서 불행이 피해 가는 법은 없더라,

하늘에서 보면 나만 쏙 빼놓을 이유도 없겠지,

하시던 할머니는 망연한 표정이었어.


이어서 고난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지적한다.


"고난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견디거나, 돌파구를 찾으려 든다.

어떤 이는 지치지 않고 몸부림친다.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축축한 지하감옥에 갇혀서 나는 억울하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 달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탄원서를 온갖 데에 써 보내거나.

숟가락으로라도 바닥을 파서는 감옥을 빠져나가 든다.

가만히 주저앉아 해방의 그날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는 없다-는 적극적인 자세이다.

어떤 이는 조용히 견딘다.

엉뚱한 곳에서 멈춘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

혹한의 계절이 끝나고 감옥에서 풀려나 자신의 무고함이 세상드러나기까지,

울화를 참고 몸을 돌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드물게는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자기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는 글을 뼈에 새기기도 한다.

언제인가는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지기를 바라며 한 자 한 자 피눈물로 써 내려갔을 처절한 고발장은,

그러나 시간 속에서 허공으로 흩어져버릴 뿐.

대다수 보통사람들은 울분만 터뜨린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세상을, 하늘을, 자신을 원망하며 문제의 진짜 원인은 찾으려 들지 않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그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마음과 육신의 에너지를 몽땅 소진하여 망가져간다."


고난이 곧 불행은 아니라고 한다.

화려한 시절에 우리는 기쁨을 누리고 즐거움을 즐기는데

겨울의 죽음은 고단하지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물질도, 감정도, 에너지도 최대한 아끼면서,

지난 시간을 성찰하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자.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나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분석할 것.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거나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허망한 욕심에서 벗어나면 인생은 훨씬 쉬워진다고.

애초에 성공이라는 목표가 현실성 없는 상이었을 수 있고,

무언가를 이루기까지 필수적인 실패라는 경험을 가질 수 있음에 오히려 고난을 감사하라, 고 덧붙인다.


그래서 책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의 인생을 이루리니,

그것들의 총합이 내 인생이라는 그림으로 완성된다."라고 결론 맺는다.

살아간다는 건 진부한 이야기의 연속이다.

살아갈수록 뻔한 교훈의 말씀을 절절하게 공감한다.



폭설이 내리고 세상이 얼어붙은 며칠 동안,

사방에서 스며드는 냉기로 건물의 허술한 단열 능력이 드러나고.

그래서 아침이면 포근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하면서도

은이는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 사라졌던 평온한 일상을 회복했다.

하루종일 집안에서 혼자, 외부와 연락을 끊고는

밥 세끼 꼬박꼬박 음식을 만들어 먹고

집을 치우고.

늦잠을 자고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은이는 매 순간 기쁨을 느꼈다.

별 탈 없이 지나가는 평온한 이 일상을 자신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일견 의젓한 듯 연이은 시련을 겪어내면서 사실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그래서 무사하게 마치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절실하게 확인한다.


큰 바다의 거친 풍랑을 건너온 지난 5년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힘써 꾸려주셨던 안전하고 든든했던 배는,

풍파가 몰아치는 해역을 지나면서 이곳저곳 부서진 난파선이 되어 바다를 떠돌다 좌초해 버렸다.

먼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마음과 몸이 심하게 아파진 할머니는 은이에게 기대었다가 두 달 전 멀리 떠나셨다.

두 분을 잃고 혼자, 은이는 작은 배를 꾸려 인생이라는 대양을 건너야 한다.


착실하게 꾸려가는 일상이,

고난의 바다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고 헤엄칠 수 있도록 구명대가 되어주리니.

아무리 고달픈 현실에서도 먹고 자고 일하는,

성실하게 꾸려가는 일상의 틀은 포기하지 않아야 해.

추위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동안 은이는 집에서,

하루종일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 먹으면서

오직 책 읽고 피아노 치고 그림 그리며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겨울방학으로 돌아간 듯,

평화와 안정감을 느꼈다.

행복해.

나는 이거면 돼.

그러다 슬퍼져서 밤에 조금 울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즐겁게 놀기만 해도 되는 걸까요?

이전 03화차근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