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넘어서야 하는 것들

은이의 작고 예쁜 집

by 기차는 달려가고

괴로움으로 잠이 다.

목이 부었다.

기침이 나오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어젯밤에 들어와서 겉옷만 벗고는

조금만 누워있다가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했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비틀비틀,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데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

옷을 든든히 입고 나갔는데도 으슬으슬하더니 그게 병의 증상인 거였다.


마지막 학기가 끝나자 곧 은이 생일이었고,

금방 연말연시에, 졸업식을 앞둔 이 시점까지 갖가지 명분으로 은이는 바빴다.

아주 추웠던 며칠 외에는 친구들이 매일매일 은이의 집으로 찾아오거나.

학교 앞, 그러니까 집에서 도보로 20분 안팎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보낸 날들로 지금 은이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병원에 가야겠어, 생각은 들었지만 축 늘어져서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네.

오후에 미술관에서 만나 같이 전시회 보기로 한 친구에게 사정을 알리고 도로 눈을 감았다.

비몽사몽 하다가 오후 늦어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사과 하나 깎아먹고,

제일 가까운 내과 병원으로 향하는데,

두 발이 둥실둥실 허공을 떠다니는 듯했다.

차례를 기다려 의사에게 몸 상태를 말하다가 갑자기 목이 잠기더니 눈물이 맺히고 말았어.

나약했다, 은이.



어제저녁에 이번에 졸업하는 친구들을 축하한다고 동기들이 모였다.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휴학했던 은이는 졸업이 늦었는데.

여자 동기들은 이미 졸업해서 그냥저냥 일을 하거나,

기약 없는 취업 준비생이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있거나 유학 중이거나 해서,

동기들 전체 모임은 오랜만이었다.

안부와 근황을 물으면서 저녁을 먹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서로의 진로 문제, 일 문제로 꽤나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좋은 내용은 없었다.

각자도생의 난국에, 더구나 전공만으로는 취업 길이 거의 막혀있어 다들 힘들어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은이 말고는 모두가 벌겋게 취해갔을 때,

여자 동기 하나가 너는 일을 안 할 거라면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 고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주신 돈이 조금 있어,라고 짧게 대답했는데

아까부터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그 동기는 은이를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우아한 상속녀로군.

나도 너처럼 몹시 피로하고,

나도 너처럼 앞날을 모색할 시간을 갖고 싶단다,

그런데 나는 돈이 없네.

받은 돈 다 쓰면 대책이 없어. 나중에 어떡할지 무대책이라 나도 불안해,라고 은이가 대답했지만.

동기는 계속해서 은이에게

나는 말이지 매일매일이 막막해, 너처럼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먹고살기 힘들어. 불안해 미치겠다고!,

크게 크게 떠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그래? 하면서 그 동기의 언행을 말리는 척은 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기보다 은근히 동의한다는 느낌을 은이는 받았다.

지금까지 모두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해 왔고

동기나 선후배 누구와도 무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무례한 언행이 방조되는 모습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상한 건 맞다.

쟤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술주정하는 거라고

네가 이해하라고 동기 하나가 은이를 다독였고.

은이도 별로 친하지 않았던 그 여자 동기에게 화가 난다거나 딱히 불쾌감까지 느끼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나이에,

현실적으로 선택지가 없는 어려운 사정들이니.

많이 속상하고 힘들구나, 하면서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왜 나한테 화를 내?, 서운한 기분은 남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냥 '은이'일 뿐으로 살아가겠다, 마음먹었지만,

아무리 현실감각이 소실된 은이라 해서 불안하지 않은 게 아니다.

지금 하려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물음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명백한 답을 내놓기는 어려웠고.

언젠가는 나만의 뭔가를 이루어낼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은이의 바람일 뿐, 누가 확답할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루어낸다 해도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단히 어렵다, 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른 생계수단이 있냐,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었으니.

갖고 있는 얼마의 돈도 전부 은행에 저금했지 투자라는 개념은 아예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아서,

알뜰하게 살겠다는 결심 말고는 은이에게 뚜렷한 생계 대책은 없다.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를 바라는 게 아니다.

이름을 날리겠다는 기대도 없다.

물질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자라왔고 경제적인 면에 둔감해서 사실 은이는 돈이 없는 상태를 실감하지 못한다.

돈을 벌기 위해 자유로움을 잃는다든지,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싫어서.

무엇보다 만한 일 찾기가 불가능해서 취업은 고려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벼랑에서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가난뱅이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재능이 모자라거나 의욕을 상실해 더 이상 작업을 지속할 수 없다, 고 판단됐을 때.

지금의 은이로서는,

'그동안 행복했다. 나의 한 시대를 마치고 다음 단계로 떠난다'며 쿨하게 작업을 포기하는,

담백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돈은 다 써버리고 작업은 지지부진하 계속되는 실패에 마음까지 피폐해져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으로 변해버릴까, 하는 상황이 은이는 두렵다.

이를테면,

내 선택이 어리석었다, 실패와 가난에 절망하여

돈만 된다면 무슨 인 들 못하겠어?, 하면서 돈을 애걸복걸한다거나.

사람이나 어떤 사안을 대할 때 옳고 그름은 제외하고 얍싹하게 내게 이득이 될까 아닐까, 만 따진다거나.

반대로 절망에 빠진 패배자가 되어 무기력하게 비틀거리거나.

속으로는 지독하게 자책하면서도 정직하지 못하게

내가 무조건 옳아, 나를 몰라주는 니들이 틀린 거야,라고 오기만 남은 졸렬한 사람으로 팍팍하게 나이 들어갈까 봐.

그러니까 여전히 낭만의 세계에 속해있는 은이로서는,

가난이나 실패가 아니라 가난과 실패로 인해 자신이 보기 싫은 인간형으로 나이 들어가는 게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자신을 잘 지켜내면서,

작업도, 사람도 나날이 깊이를 더해가는 성숙한 어른으로

조촐하고 단정하게 살아내고 싶다.

과연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용기백배 하다가도 은이는 문득문득 앞날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곤 한다.


병원에 다녀오고 은이는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잠을 자는 건지 약에 취한 건지 몸은 한없이 늪으로 빠져들고

의식은 몽롱하게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잠깐씩 정신이 들면 휴대폰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낮인지 밤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얼른 분간이 되지 않았다.

땀으로 젖은 잠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약을 먹어야 하니 맛도 못 느끼면서 레트로트 죽을 데우거나 친구가 현관 앞에 두고 간 과일을 씻어먹거나.

그러고는 곧 자리에 누워 의식을 잃었다.



책은 말한다.

"인생이라는 길은 누구에게도 탄탄대로가 아니다.

조금 가다 보면 길은 꺾이고,

또 조금 가다 보면 또 확 꺾이는 깜깜한 미로 같다.

앞이 보인다고 신나서 갔는데 떡하니 넘을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장벽이 나타나고.

여기가 막다른 곳인가, 주저앉을 하면

빼꼼히 좁은 길이 열린다.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앞날이란 아주 짧은 시간이어서

그 뒤에 어떤 날이 펼쳐질지는 길의 끝까지 가봐야 안다.

그저 방향을 가늠하면서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내가 어느 한 시기를 진심으로 보냈다면,

그러니까 선택할 수 있는 작은 범위 안에서라도 스스로 납득하여 선택하고 나름의 기쁨을 느끼면서 내 할 만큼은 했다면,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간절히 바랐던 좋은 결과라면 물론 환영하겠지만,

(지금은 기뻐하는 그 좋은 결과가 나중에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요.)

그렇지 못한, 아니 예상을 뛰어넘는 나쁜 결과- 심지어 사약을 받게 되더라도,

이것이 내 운명이라거나 또는 내가 살아내야 할 인생의 한 단계려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행복감을 느끼면서 충실하게 보낸 시간은 감내할 수 있는 고난의 용량을 확장해 준다.

(아, 물론 이건 나 혼자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얘기다.

나의 행위로 인해 부모나 자식, 배우자의 삶까지 망가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이란 좋은 것, 내 맘에 드는 것만 골라 담는 쇼핑카트가 아니다.

쓰고, 달고, 시고, 맵고, 짜고, 떫고, 차고, 뜨거운 모든 맛이 어울리면서 내 인생이라는 요리를 만들어간다.

그러니 인생의 어느 단계를 시작하면서 결과를 미리 조바심치거나,

타산적으로 결과를 재고 따지지 말도록.

세상만사는 사람의 계산을 넘어서고,

인생이란 감히 사람의 짧은 머리로 따져지는 셈법이 아니다.

우주라는 광대무변한 크기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휩쓸리는, 미세한 먼지 한 톨 같은 개인의 인생행로를 누가 일일이 예정하겠는가!"



며칠이 지나 아침,

눈이 반짝 떠졌다.

몸에서 무거운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듯 몸이 가뿐하네.

몸이 아픈 동안은 음악 듣기도 버거웠는데,

스피커에서 흐르는,

통통통통 피아노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마치 봄날의 나비처럼 쾌하다.

침대를 벗어나 몸을 일으킨다.

휘청거리기는 하지만 괜찮은 걸.

어, 근데 왜 이리 방바닥이 따끈따끈해?

방 공기가 후끈해서 실내온도를 봤더니 30도.

몸에 한기가 느껴지니 무의식 중에 난방온도를 자꾸 올렸나 보다.

악, 가스비!, 비명을 지르다가

그냥 몸이 회복된 값으로 치기로 하자,

자책하면 뭐 해.


냉장고에는 생강차를 만들겠다고 계피와 함께 사둔 생강이 곰팡이 포자를 피우고 있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옷들이, 모자가, 목도리가 행거 위에, 옆에 대충 쌓여있고.

현관에는 슬리퍼 말고는 신발장에 들어있어야 할 신발들이 주르르 나와있네.

책상에는 책들이,

충동적으로 구입한 문구류와 잡동사니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 오후.

은이는 창문을 활짝 연다.

청소기를 돌리고 옷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면서 책상 위를 말끔하게 비운다.

밥을 해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미역국을 끓이고 소고기와 버섯, 마늘을 볶았다.

많이 먹어서 숨이 차.

헛돌헛둘,

팔, 다리를 쭉쭉 펴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소화제를 찾아먹는다.



살아가는 하루하루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넘어서야 한다.

매일매일 자잘한 게으름을 넘어서고,

자질구레한 소비 충동을 넘어서며.

할까 말까, 우유부단한 망설임을 넘어서야지.

불쑥불쑥 치미는 경박한 감정을 넘어서고,

함부로 단정하는 경솔한 판단을 넘어서야 한다.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마음을 좀먹을 뿐이니.

검토는 하되,

될까 말까에 연연하느라 내용에는 미흡한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본질과 군더더기를 구분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그러나 소소한 즐거움은 놓치지 않기.


진인사 대천명,

일신 우일신!

할아버지께서 은이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고마워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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