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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06. 2024

멋지게 살고 싶었어

은이의 작고 예쁜 집

친구가 퇴근하고 은이 집으로 왔다.

너무 속상해, 회사 싫어,를 외치면서 

은이야, 저녁밥 해줄 거지? 하는데 오지 말라 하겠나.

맨날 다이어트한다고 닭가슴살만 더니

오늘은 삐뚤어질 거야, 면서 맥주랑 닭강정을 사 왔다.

그러고는 은이가 준비한 구운 오리를 곁들인 오리엔탈 드레싱의 샐러드와 새우죽을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싹싹 긁어먹었는데.

밥 먹내내 돈 벌기 힘들어, 징징.

사장님 나빠요, 징징, 고달픈 직장 생활하소연했다.

성의 있게 듣다가 지친 은이가 하품을 해도.

꼬박꼬박, 쏟아지는 졸음을 깨우느라 커피를 내려도.

먹어볼래? 하고 구운, 뜨거운 고구마를 먹으면서도 친구는 마음껏 울분을 쏟아내다가.

밤이 늦어서야 거의 먹지 않은 닭강정 반을 싸들고 돌아갔네.

다 가져가라니까,

나눠 먹으려고 사온 건데 그럴 수는 없지, 면서.


부정적인 얘기만 내리 몇 시간 들어주느라 은이는 심신이 지쳐버렸.

친구가 돌아간  잠들었는데 금세 깨고 말았지.

새벽 내내 잠을 청하느라 뒤척뒤척.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다가.

수면음악을 듣다가.

싱잉볼의 은근소리를 들으면서 창문으로 날이 밝아온 걸 보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한두 시간이나 잤나?

다른 친구가 들이닥쳤다.

아침밥 먹다가 엄마랑 싸웠어, 세수도 못하고 집 나왔어, 엉엉.

음,  편이 더 심각하군.

눈물, 콧물 짜면서 버젓한 직장을 못 구해 계속 아르바이트만  는 자신의 처지를 으흐흑, 비관하고.

눈물을 닦으며 캄캄한 앞날에 절망하면서 핑, 시원하게 코를 풀더니.

신경질에 잔소리로 딸을 달달 볶는다는 엄마 흉을 한 보따리 어놓았다.

그래도 워낙 낙천적인 친구라서 은이가 부엌에서 뚝딱 차려내 온 떡갈비와 매운 비빔국수감격하더니.

너는 금손이야,

맛이 매직이다,

행복한 표정으로 한 그릇 더, 한 그릇 더, 를 주문했다.

은이 몫에서 덜어먹고도 모자라 결국 국수를  삶았고.

친구는 냉장고에 들어있는 어제저녁의 닭강정을 싹 해치우더니,

찐 고구마에, 사과, 귤까지 한 바구니 먹어치웠다.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힝, 먹는 걸로 푸느라, 힝, 아침많이 다고, .

"저러니 살만 !"

 먹는 딸을 어머니가 빈정거리면서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는데.

음, 많이 먹기는 하네...

배가 부르자 뭉개진 자존심을 되찾은 듯 평소의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온 친구는,

상을 치우고 설거지하는 은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꽁알꽁알 어찌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우리 엄마는 하루종일 뒤꽁무니만 보면서 나를 괴롭혀!", 라거나.

"우리 엄마 잔소리 때문에 내가 미쳐버린다니까."가 어떤 건지 은이도 체감하게 되었다.

나중에 친구 딸도 집 나오려나.

하여간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면서 친구는 

"역시 수화물이 기분 푸는 데는 최고야", 헤헤 웃다가!

은이 화장품으로 예쁘게 화장하고는 아르바이트 간다고 룰루랄라 집을 나갔다.



어차피 이번 겨울은 방학이라 치고 집에서  쉴 생각이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쳐서 멀리 여행까지 떠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무소속시민이 되어가는 과도기!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만났던 친구들을 실컷 만나고, 

가까운 곳을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렇게 했지.

그러기는 했는데 은이가 생각했던 '신나게 놀자'가 이런 건 아니었지, 싶다.

"이건 그냥 생활이 방만한 거야."


온 나 청춘들이 들락거리는 동네 건너에 다 보니

오다가다 친구나 학교 선후배들이 은이 집에 쉽게 들르기도 하고.

나오라거나 만나자거나 해서 불러내는 일도 잦았다.

피곤해서 안 나가려 하면,

옷만 갈아입고 그냥 나와, 바로 요긴데 뭘! 서운해하면서,

막상 나가보면 왜 불렀나? 싶을 때도 있더라.

은이가 그곳에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걸.

집에 들락거리는 친구들도 많아서

친구들이 오면 음료에, 간식에, 밥까지 차려줘 은이 마음이 편한데,

친구들 방문이 빈번하다 보니 일도 많고 지출많아졌다.

겨울 동안 예상했던 생활비의 몇 배가 지출됐다.

살림도구를 장만하는데 들어간 적지는 않았지만

먹느라고 쓴 돈이 훨씬 많았다.

뭐 이리 비싸지?


한동안 아무도 못 만나고 고요히 지냈 때문인지

잦은 외출도, 얘기하는 것도, 남의 말을 듣는 일도 너무너무 피곤했다.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막 시달린다는 느낌이 었다.

밤에 자려고 누워서 하루 지낸 일을 떠올리노라

오늘 하루, 관심도 없는 겨우 그딴 얘기하고 듣느라 시간을 버렸구나, 하는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점점 자고 깨는 시간이 엉망이 되어가고,

늘 피로했으며.

책을 들어활자에 집중이 안 되었고

남은 시간에는 뒹굴뒹굴 누워서 휴대폰만 붙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비되는 돈도 돈이지만 시간과 체력과 감정의 소모가 지나쳐서 정말 아까웠.

이건 아닌데.

온 동네 사랑방이 된 거 같아.

담장 없는, 대문도 없는, 눈치 볼 주인 없이 서비스만 제공되는 오다가다 쉼터.



멋지게 살고 싶었다.

신입생 시절에 은이와 친구들은 함께 하는 멋진 앞날을 꿈꾸었었다.

그때 그렸던 그 '멋짐'이라는 풍경에는 친구 또는 동료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 반드시 등장했었다.

그때 친구들과 둘러앉아 말없이 음악을 들어도 좋았고.

전시회를 보러 가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콘서트에 참석하거나 풍경을 바라보면서,

일체감을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각자 추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들 뚜렷한 자신의 방향성을 갖고 작업에 몰두하는,

물질과 소유라는 세속에서 질척거리지 않고 꿈꾸는 방향을 향해 힘들여 살아가는 사람들.

중요한 예술 사조마다 시대와 인간의 삶이라는 공통의 관심사와 문제의식을 갖고,

서로 논쟁하고 교감하면서 자신의 고충 나누고 문제를 토론하는 인연들이 있었다.

싸우고 갈등하고 시기하고 경쟁도 지만

충고하고 영감주고받으면서 서로 이끌의지하는,

삶과 예술을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는 동료들이었다.

오해를 받고 비난을 들으며 오랫동안 무시당했지만,

마침내 사람들은 힘 있는 움직임이 되어 시효를 다한 부패하고 무기력한 구태를 깨트리고,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다.


대학 신입생 시절 은이는 이들 예술가들과 작품들에  이야기를 친구들과 종종 나누었고.

마침내 현장에서 작품 실물을 보게 되었을 때 가슴이 뛰면서

우리도 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겠지?

눈을 반짝이며 예술가들이 겪어내는 고난과 절망까지도 낭만이라 사랑했었다.

우리도 렇게 멋지게 살자고 의기투합했었지.


그래, 우리는 멋지게 살고 싶었어.

부유함이나 세상의 평가에 완전히 무심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진심으로 그때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를 뛰어넘는 어떤 것에 헌신하고자 마음먹었었.

꿈을 꾸는 것만으로 뭐나 된 듯 우리는 얼마나 의기양양했던가?

생계 문제를 먼저 넘어서야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

생계를 위해,

그냥 사는  이러려니,

하나, 둘, 친구들은 생존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허우적허우적 조금씩 멀어져 갔다.

아직도 은이는 친구들과 모닥불 피워 놓고 노래 부르던 낭만의 바닷가에서 서성이지만,

곧 어딘가의 바다에 뛰어들겠지.

2024년 봄.

뛰어들 때가 되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피곤해하며,

잠을 깨고도 한참을 누워서 휴대폰을 보다가.

그만 손에서 휴대폰을 놓치고 말았다.

손에서 벗어난 휴대폰은 자유낙하 해서 은이 얼굴을 때리고 침대와 벽 사이 좁은 틈새에 걸려버렸.

손가락을 쫙 펴서 휴대폰을 집으려다 오히려 침대 아래로 휴대폰을 빠뜨렸다.

에고, 이 무슨, 투덜거리며 침대와 서랍장을 밀어서 휴대폰을 꺼냈는데.

흠, 같이 딸려온 머리카락과 먼지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네.

침대 아래에 고인 먼지를 치우겠다며

그전에 창문을 열어 환기부터 시켜야지, 창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유리창과 방충망이 한꺼번에 열리네.

방충망이 유리문에 끼어서 꼼짝도 안 하는 거다.

안 그래도 어제 화장실에 쪼그만 날아다니는 것이 보여 심란하던 차에,

일종의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지겨워.



책상을 치운다.

아직 작업도구는 꺼내지 않았지만,

책을 본격적으로 읽고 글도 그림을 시작해야지.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작업하려던 계획은 바꿔야겠다.

주변에 말해 시간과 작업보호받아야겠다.

고립된 환경에 스스로 갇히기.

하지만 숨지는 말자.


하루의 시간표를 짜고,

일주일 계획, 한 달 일정정해야지.

주변에 불가침을 선언하자.

생활과 작업의 영역에 분명한 선을 그을 것.

가정이나 직장 같이 가시적인 울타리가 없는 명의 혈혈단신으로 세상을 살아내려면,

존재 자체가 단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문을 내어 세상과 소통은 하겠지만

그것이 친밀감일지라도 함부로 내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나의 영역을 지켜내야 한다.


겨울이 끝을 보이고 봄이 다가오는 시기.

은이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2024년 봄이 곧 시작된다.

미룰 수 없어.


아, 그전에 할 일이 있구나,

그것까지만 잘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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