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이루어낸 일

은이의 작고 예쁜 집

by 기차는 달려가고

시작은 이러했다.

물건 넣을 공간이 부족했던 은이는 앞으로 외출할 날이 적어질 테니 입고 신는 물건을 확 줄이자 마음먹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가져가라고 말을 꺼냈다.

얘기하고 보니 다들 쓰지 않지만 아까운 물건들을 적지 않게 들고 있어서,

그런 물건들을 서로 바꾸자, 하는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몸에 걸치는 물건은 직접 입고 신어 봐야 하는 거라

언제 날을 잡아 한자리에 물건 들고 모이자는 약속은 했지만

마땅한 장소를 찾기 힘들어 분분하다가,

마침 은이 사는 건물 1층에 빈집이 생겨 집주인에게 하루만 빌릴 수 있는지 문의했고.

운 좋게도 공과금 정도 비용에, 청소 깨끗이 해놓는 조건으로 빈집을 빌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친환경- 재활용이라는 원칙 아래 행사 방식을 왈가왈부하다 소문이 퍼지면서

참가하고 싶다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 버렸으니.

운영위원들까지 뽑아 진행하는 큰 행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과정으로 3월 어느 토요일 오후,

은이의 친구들과 그들의 친구 수십 명이 참가하는 중고 물품 교환행사가 열리게 된 것이다.

시작은 가벼웠으나 일이 성사되기까지 우여곡절과 갈지자 횡보의 사연이 구구절절인 건 말할 필요도 없지.

사안마다 "그게 되겠어?", "아이디어는 좋지만 현실에서는, 쯥" , 김을 빼는 투덜이는 꼭 있기 마련이고.

중구난방 제각각의 의견이 분출했으며.

재고로 쌓인 수공예품을 팔아달라는 선배의 애달픈 청이 끼어든 데다.

자기가 내놓는다 하고는 이게 얼마 주고 산 건데, 본전 생각으로 내놓을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다.


하여간 결론은,

물건을 내거나 사려는 참가자는 모두 참가비를 낸다.

주최 측은 참가자들에게 참가비만큼의 야매 상품권을 발행하여 물건을 교환할 있게 하고,

음료와 가벼운 식사를 제공한다.

교환할 물건은 다가오는 봄, 여름에 사용할 수 있는,

누가 봐도 쓸 만한 옷, 신발, 가방, 소품들을 일인당 30점 이하로 해서.

당장 쓸 수 있도록 세탁하고 손질해

물건마다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 짜리 가격표를 골라 붙이기로 했는데.

바꾸고 남은 물건은 보육원을 나와 자립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기증하고,

얼마가 되었든 비용을 제외한 최종 수익금은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는 데에 쓰기로 합의했다.

중간에 누군가의 제안으로 물건의 출처와 물건에 얽힌 사연들을 재미나게 메모를 첨부하도록 했으니.

그리하여 헤어진 남자 친구가 사준 귀걸이라서 아깝지만, 쯧.

아르바이트해 돈으로 전 남친 처음 만날 때 사입은 옷이야, 흑.

매정한 시키! 너를 떠나보낸다... , 뭐 이런 비련의 서사가 물건들을 장식하게 되었다.

물론 애정해 마지않는 원피스를,

다시는 그 사이즈로 되돌아가지 않을 몸이라서, 또르르르 눈물의 꼬리표가 달린,

각양각색의 사연이 강물처럼 흐르게 되었으니.

웁스~


조심스럽게 행사를 치르겠지만 사람들이 들락거리면 아무래도 소음이 발생할 것이라 건물 입주자들에게도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래서 은이 집에 모인 운영위원들은,

이러저러한 행사를 어느 날 어느 시, 몇 호 집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심 또 조심하겠다면서.

관심 있으시면 들리시라는 초대의 뜻을 담은,

예쁜 그림을 일일이 그려 넣은 손편지를,

귤과 과자가 담긴 쇼핑백 안에 넣어 현관 문고리마다 걸어두었다.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무엇보다 참가한 모두가 즐거워했다.

흥겨운 축제였다.

행사를 구상하고 진행하는 과정부터 모두 들떠서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과연 뭐가 될까, 싶었는데.

마침내 계획이 실행되기까지 매 과정에 집중하다 보니

그 잡념 많을 20대 처자들이 일상의 걱정 근심을 싹 잊어버린 거였다.

행사라는 게 영 번거로운 일이라서 준비할 항목이 적지 않았고.

다들 처음이다 보니 특히 운영위원들 고생이 많았는데.

비어있던 집에서는 먼지가 끝없이 나와 청소하느라 이른 아침부터 걸레와 빗자루를 휘두르면서 깔깔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무 가구도, 도구도 없어서 수백 개 물건들을 늘어놓고 걸어둘 방법을 고심해야 했고.

좁은 공간에 수십 명이 우글거리면서 먹고 마실 일도 문제였다.

도시가스가 끊긴 상태였는데 다행히 집주인이 실내 난방을 할 수 있게끔 협조해서 난방을 할 수 있었다.

수십 명 분의 가벼운 식사와 음료를 준비하고,

남은 물건을 정리하고 포장하는 등

아이쿠야, 해결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였는데.

누구 하나 몸 사리지 않고 먼저 나서서 일을 찾아내고

서로 의논하고 협력하면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참가한 모두에게 자신감과 활력을 주었으니.

"맨날 만나서 카페 전전하며 수다만 떠는 것보다 같이 일이 있으니까 훨씬 신나고 재미있다"는 만장일치를 이루었다.


느닷없이 완장을 차게 된 운영위원님들께서는 다들 솔선수범하여,

집에 있는 헹거와 옷걸이, 전기주전자나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커피머신들을 어머니 차에 거나 등에 짊어지고 나타났고.

재활용이라는 취지에 위반되지만 먹고 마실 그릇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일회용 컵과 접시, 수저와 컵라면을 구입할 수밖에.

또 신발주머니로 쓰려고 비닐봉지도 사용했으니

다음에는 일회용품 문제를 꼭 해결하자고 다짐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친구의 지휘 아래 각종 음료를 마련하고,

김밥과 주먹밥, 떡을 주문했.

또 고구마를 구울 미니오븐에, 떡볶이를 끓일 냄비 같은 살림도구들은 은이 집에서 총출동했다.

과일도 한 보따리 배송받아서 씻고 깎아서 일인분씩 예쁘게 종이컵에 담았고.

어머니가 손수 유자를 손질해 비정제 설탕으로 공들여 담근 유자청 한 병을 몰래 들고 나온 도둑고양이 딸은,

따끈한 유자차를 한 잔씩 나눠먹은 뒤 어머니께 이실직고해서.

야이, 나쁜 뇬아, 하는 휴대폰 너머로 터지는 어머니의 우렁찬 고함에 다들 깜짝 놀랐지만.

건강한 유자차로 힘이 불끈 솟은 친구들이 어여쁘신 어머니께 어울릴 만한 공주님 풍의 머리핀을 선물했다는 딸의 얼렁뚱땅에,

갑자기 교양 있게 목소리를 가다듬으신 어머니는 친구들 맛있게들 먹으라고, 수고가 많다고, 어쨌든 허락은 하셨다.


커다란 타포린 가방에, 주렁주렁 쇼핑백에, 여행용 캐리어에 물건을 싣고 줄이어 들어선 참가자들은,

행사 소식을 알고 빈손으로 들린 친구의 친구들도,

일단 들어오면 도무지 나가지를 않고 자리 잡고 앉아서는.

신나라 하며 옷을 입어보고,

신발을 신어보고,

모자도 써보고,

화장품을 찍어 바르며 웃음소리가 높이 높이 날아오르니.

느닷없이 패션쇼가 벌어지고

걸그룹 포즈를 흉내 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SNS로 이를 본 친구들이 또 "꺄, 문 닫지 마!" 하면서 급히 달려왔다.

득템 했다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중에

지갑이 막 샌다,는 비명이 들리는가 하면.

이 옷에 이별의 저주가 붙은 건 아니겠지?, 지금 사랑에 진심인 처자는 잘 어울리는 블라우스를 골라놓고도 심난해하더라.


먹성들도 좋아서 준비한 음식이 간당간당해지자 둘이 손잡고 뛰쳐나가 급히 튀김과 순대를 한 보따리 사 오는 해프닝이 있었고.

고구마가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황홀한 냄새에 꼴딱 꼴딱 침이 넘어가는 대기자들을 보고 은이가 날고구마를 깎기 시작했는데.

날고구마 인기가 어찌나 좋던지 과도 하나로는 모자라서 은이의 부엌칼까지 끌려 나오게 되었다.

이 건물에 산다며 고개를 빠끔 들이민 한 처자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코앞에 들이미는 떡볶이 한 그릇을 오물오물 받아먹고는,

요것조것 물건을 한 아름 계산하면서.

오늘 과소비 때문에 옷장 하나 더 사야 할 판이라고 킥킥, 즐거운 항의를 남기며 행사장을 떠났는데.

곧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와 토마토 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걸로는 밥값도 안 되겠지만." 하하하.


매일 걷기를 할 요량인 은이는 무채색 차림새인 평소와 달리 요란한 색상의 워킹화를 신어보고는,

잘 맞아, 기분 전환에 괜찮겠어, 고이 챙겼다.

그렇게 참가자들은 가져온 물건도 많았지만 가져가는 물건도 적지 않았으니.

요새 누가 물건을 낡을 때까지 씁니까?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물건 아까운 줄 모르는 시대라서 지구에는 쓰레기가 넘쳐흐른다고 열변을 토한 친구는,

적어도 한동안은 이미 갖고 있는 물건으로만 살겠노라, 선언해서.

친구들은 행사를 위해 만든 단톡방을 앞으로도 유지하면서 환경에 관한 문제의식과 정보를 공유하자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렇게 책임감을 갖고 생활 속에서 친환경을 실천하기로 진지하게 약속했으니.

지구야 미안해- 친구들이 그만큼 늘어났겠죠?



늦은 밤,

뒤처리를 마치고 말끔해진 집에 둘러앉았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좀 섭섭하고 홀가분하달까.

다들 조용히 손에 든 차만 홀짝홀짝 마실 때 바리스타 친구가 차분하게 입을 여네.

" 다음 달에 제주도로 일하러 가."

옼? 다들 깜짝 놀랐다가,

금세 와, 좋겠다! 환호성을 올렸고.

이구동성 나도 가고 싶다고,

제주도에 내가 할 만한 일이 있을까, 물으면서

계속 제주도에서 살 거냐고, 관심이 집중됐다.

최소 1년은 일하기로 약속했으니 1년은 있겠지.

그 뒤의 시간은 미리 정하지 않으려 해, 친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은이도 작업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집에서 혼자 작업만 하고,

금요일, 토요일에 외출도 하고 친구들을 만날 거야.

일요일에는 집안일을 해야지."라고 시간표를 설명했다.

극히 일부만 미술 작업을 계속할 뿐,

다른 일을 하거나 찾고 있는 친구들은 은이의 결심을 이해하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그래. 예술은 몰입이 중요해.

먼저 마음을 가다듬어야 작업에 집중할 수 있지."

고독은 창작하는 이들의 숙명이다.

아마 가난도 창작하는 이들의 운명이 되리라.


은이 동기의 친구로 다른 학교에서 조형을 전공한 친구가 은이의 계획을 아주 반가워했다.

예쁘장하고 얌전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졸업전시회에서 본 그 친구의 작품은 상당히 힙하고 강렬해서 뚜렷한 인상을 받았는데.

대학원에 진학하더니 곧 휴학하고 혼자 작업을 한다는 친구였다.

은이가 홀로 작업을 하겠다니 나까지 든든해지는구나,

동지가 생겼어.

우리 잘해보자.

그 친구는 오늘 행사를 통해 창작자의 소통 방식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우리처럼 유형무형의 인맥이나 기존 시스템에 끼어들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업하려는 사람들은,

사실 관람객이나 대중들에게 작품을 보여줄 기회조차 갖기 어렵잖아?

어쩌면 오늘 행사처럼 우리 작업 내용에 걸맞은, 우리 나름의 전달 통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됐어.

그게 어떤 건지 아직은 모르지만

세상은 계속 바뀌어가고,

사람들의 인식이나 기술 변화에 맞게 우리 작업물을 소개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라."


전시나 판매는 나중 일이리라.

지금은 내용을 만드는,

그것도 내용을 만들고자 마음을 먹었을 뿐인 시작도 전인 단계인데.

혼자 작업하는 시간도, 과정도 중요하지만,

뒤에는 작업물을 통해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교감하는 현실적인 통로가 절실하니.

이미 만들어진 네트워크에 비집고 들어가길 포기했다면,

다른 이들과 작품이 만나는 소통과 전달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작업은 포기했으나 여전히 예술 언저리를 맴도는 친구들이 말한다.

"우리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창작은 포기했지만 예술을 사랑은 하잖아?"

그래.

사랑을 키우면 그 사랑이 닿게 하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겠지.

행사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충만해진 그날,

친구들은 기존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세대 나름의 참신한 예술적 공감 통로를 만들어내자, 고 용감하게 결의했다.


되겠느냐, 아니냐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 뒤에,

세상과 통하는 길을 내자.

해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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