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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27. 2024

보살핌의 순환

은이의 작고 예쁜 집

오래전에는 숲이었을  언덕배기,

경제가 활발해지고 서울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던 시기에 택지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고만고만한 땅에 집장사들은 서너 개, 거실과 부엌,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볕이 잘 드는 작은 뜰이 있는 단층 지었고.

새집을 장만한 부부와 아이들은 행복해하면서 마당에 꽃을 심었겠지.

세월이 지나 자식들은 성인이 되고 부모는 노인이 되었을  인근 지역번화해지면서 땅값이 올랐다.

집주인들 차례차례 집을 팔아 아파트로 이사했고.

투자자들은 여름이면 넓게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를 베어내고 대지를 꽉 채워 다세대주택지었다.

집을 팔지 않은 서너 채의 주인들은 직접 헌 집을 허물고 건물올려,

주인이 한 층살고 다른 층은 세 놓았다.

은이가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는 창문 아래  풀더미가 수북한, 날씬한 사람 만한 좁은 이 있었다.

낙엽이 질 무렵 이사 온 은이는 공사를 덜 끝내서 방치된 듯한 을,

여기까지가 우리 땅이요,라는 집주인의 선언 여겼는데.

며칠 전 노부부가 호미로  땅을 고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목례하면서 잠깐 들여다보니 잡초인 줄 알았 지푸라기 사이에 연둣빛 새순이 꼿꼿이 솟아오르고.

노부부는 풀더미를 거두어 고른 땅에 씨를 뿌리시네.

그러니까 하찮게 보였 메마른 지푸라기는 지나간 생명이 남긴 흔적이었고,

겨울의 죽음을 거쳐 봄의 생명이 소생하 거였다.

울컥, 마음에 파문었다.


지루했던 긴 겨울은 끝을 보이,

울퉁불퉁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은이는 할머니 장례 때부터 계속 입어온 검은색 옷들을 빨아서 일부러 헌 옷 수집함을 찾아가 넣었다.

실내에서라도 화사하게 입을 요량으로 하늘색과 아이보리 계열의 원피스 두 벌을 꺼낸.

겨울 옷들은 세탁해서 옷장과 서랍장에 가지런히 개켜 넣.

이불 속통씌웠던 겨울용 이불 커버는 가벼운 간절기 바꾼다.

기온이 갑자기 오른 날,

은이는 창문을 활짝 열어 눅눅한  냄새가 빠지도록 싱크대 서랍들까지 놓았고.

벽을 탈탈 털고 윙윙 청소기를 돌렸으며 빡빡 물걸레질을 했다.

그렇게 3월의 남은 날들에 은이는 대청소를 하고, 매일매일 세탁기를 돌리, 반듯반듯하게 물건을 정돈하고,

영-선 남매에게 차려줄 음식을 연습하며 보냈다.

작업은 여전히 시작하지 못하고 다.



영-선 남매 변함이 없다.

4년 전 교환학생으로 가있던 해외에서 은이는 부활절 방학에 영-선 남매와 함께 여행했는데,

입고 먹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남매는 4년 전 여행에서 입었던 차림새 그대은이 집을 방문한다.

할머니 병세가 악화됐던 지난 2년 동안,

남매가 서울 집에 다니러 와서 셋이 만나도 길게 이야기 나눌 형편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밤을 새우며 예전처럼 통통 통, 탁구공을 주고받듯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활짝 활짝 웃었으니.

서로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하고 믿을 수 있는  깊은 이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언어에 담긴 뜻 정확하게 파악하여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관계는 얼마나 큰 축복인지, 참으로  감사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은이가 정성껏 요리한 냉채, 갈비구이, 시래깃국이 차려진 밥상 남매는 감탄하면서.

어릴 적 은이 할머니가 차려주신 솜씨 좋은 밥상을 이야기했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선 언니의 말에,

요리를 시작하기까지 귀찮음을 극복하는 게 문제지 음식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라 은이가 하자.

와우, 대가다운 말씀, 이라고 남매는 은이를 놀려댔다.


영-선 남매 집에서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니 생체가 단출했다.

덮밥이나 국수 같은, 간단하면서 영양가를 고려한 한 그릇 음식을 주로 먹었고.

수수하고 깔끔한  몇 벌오래 입었으며.

행동도, 말도, 소유 군더더기 없이 본질에 충실했다.

하지만 정신의 세계는 광활하고 깊어서 부모와 자식 국수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서 우주를 이야기하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면서 책에서 읽은 아프리카 역사설명했다.

세상 또는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갖는다는 것, 그러니까 진실을 알아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정리하는,

성실한 태도를 은이는 그들에게서 배웠고.

허세를 버리고 오직 본질에 충실한 지성인 다운 실생활을 은이는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

맛있는 밥과 예쁜 옷이라는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번잡하게 살아가은이로서는,

사려 깊고 단순한 생활 방식당장 닮을 수는 없겠지만.

이들 가족이 실천하 '깊이 있되 단순한 삶'은 은이에게 분명한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자신에게 휘감긴 군더더기를 벗겨내고,

한층 더 본질에 다가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은이는 늘 다짐한다.


셋은 여러 해 동안 이어졌던,

분의 할아버지들과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오래된 식당에서 먹고,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하는,

어릴 적 월례 행사를 이야기했고.

방학마다 영-선 남매의 부모님이 세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산과 바다를 다녔 여행들을 떠올렸으며.

은이 외가에 아이들이 몰려가 마치 물속에 빠진 듯 무겁고 침울 외갓집을 들썩거려 놓았 추억을 끄집어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 분의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세 아이들에게 사랑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을 새삼  떠올렸는데.

고난을 헤치고 살아온 그분들 아이들에게 보여주신 따뜻한 마음과 여유로운 태도.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엄격했던 반듯한 자세,

그분들이 드문드문 말씀해 주신 삶의 지혜와 올바름에 대하여,

묵묵히 고통을 견딘 그분들의 진지한 삶을 배울 수 있음에 감사했.

그래서 은이가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계시는 외할머니를  며칠이라도 집에 모시싶은데,

계단을 어떻게 오를지 답이 안 나온다 고민에.

영 오빠는 선뜻, 내가 업어서 모시, 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방문하게 된 손녀 집에서 외할머니는 사흘을 머무셨다.

외삼촌 네 세 식구가 다녀가고,

멀리 사는 이모 부부가 음식을 싸들고 찾아왔으며.

경기도 사는 이종사촌 언니도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한참을 다 갔다.

무엇보다 영-선 남매의 부모님이 연로한 할머니를 모시고 방문해서 두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하셨으니,

곁에 있는 들의 눈에 눈물이 맺혀버렸네.

은이는 사흘 내내 밥상을 차리고 외할머니를 돌보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을 치우느라,

허리 피고 앉을 틈이 없었지만.

내가 이만큼이라도 음식을 할 줄 알아서 모두에게 기분 좋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가끔 병원으로 찾아가 얼굴이나 잠깐 던 것과 달리,

가족들이 편안하게 둘러앉아 밥 먹으면서 아이 재롱도 보고,

옛날이야기를 나누니 하하 호호,

은이의 작은 집에는 행복과 화기애애한 가족애가 흘러넘쳤다는 훈훈한 이야기.



꽃들이 피어나고 완연한 봄이 왔다.

외할머니도, 영-선 남매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기운이 빠진 은이는 그들이 남긴 여운을 곱씹으며 며칠을 누워서 보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보살핌은 또 다른 보살핌으로 이어진다.

은이는 자신이 사랑과 보살핌의 고리 안에 들어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고 생각한다.

사악함이 세상을 몇 번이나 파괴하더라도 사랑과 보살핌의 힘이 세상을 재건해오지 않았을까?


외할머니께서 기뻐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은이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르기로 결심한다.

어른들과 의논하고 병원에도 문의해야겠지만,

가능하다면 외할머니 건강이 이만이라도 할 때 외할머니를 가정의 틀 안에서 모시고 싶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 될지는 차차 결정하겠는데,

자신이 외할머니를 혼자서라도 모셔보겠다, 는 결심에 이른다.

은이가 교환학생을 다녀와보니 할머니 건강이 몹시 나빠져 있었고,

은이는 휴학하고 할머니 곁을 지켰었다.

물론 심신이 힘들었고,

할머니 돌아가시니 자신이 더 잘하지 못한 것이 괴로움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할머니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당신이 키워주신 손녀가 곁에 있을 수 있어 다행이라생각했다.

그러니 외할머니 건강이 더 악화되어 병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지점에 르기 전에,

외할머니가 보다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은이는 돕기로 마음먹는다.


작업은...

은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작업은 평생을 동반하며 존재와 동시에 절차탁마할 대상이니.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단지 기술만 좋아지는 건 반쪽의 성공일 뿐,

내용이 담겨야 온전해질 것이니.

은이는 기술의 발전이 더디더라도 내용을 충실하게 키워낼 것이고.

그 내용에는 사랑과 보살핌을 풍부히 하여 그 순환을 확장하는 실행이 포함될 것이다.


결심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작업 속도가 느려지더라도 외할머니께 시간과 에너지를 쏟겠다.

은이는 몸을 일으킨다.

먼저 외삼촌과 상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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