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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pr 03. 2024

봄이라는 축복- 마지막 회

은이의 작고 예쁜 집

골목 어귀 노부부가 가꾸는 좁디좁 땅은 볼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볕이 잘 들지도 않는꼿꼿이 새순을 올렸던 풀은 며칠 새 쑥쑥 키를 키워서,

동그랗게 말려있던 이파리가 펼쳐지면서 두어 뼘 폭의 땅은 초록색 이파리로 복작거렸다.

씨를 뿌린 곳에서는 앙증맞은 떡잎들나란히 줄 맞춰 올라왔다.

실오라기 같이 가는 줄기는 무슨 힘으로 무거운 땅밀어 올린 걸까.

지금까지는 나무와  그저 풍경으 뭉뚱그려 바라봤지,

그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본 기억이 없네.

몸을 굽혀 자세히 쳐다보니 파릇파릇 조그만 이파리들이 미세하게 리고 있었다.

자신을 키워내 몸부림일까,

마음찡해진다.



할머니 말씀하 적이 있었다.

아직 너는 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거야.

겨울에 지독한 추위를 겪어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하면 봄한테 고마운 마음든단다.

얼음 나라에서는 봄이 오면 축제를 한다잖아.

기독교의 부활절이 왜 봄이겠어?

죽음 같은 겨울에는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내다가,

따스해지는 봄이 오면 생명들이 기지개를 활짝 펴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지.

전쟁 때 나라가 온통 망가져서 살림이 궁핍해지니까  겨울나기가 특히 힘들었거든.

집이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어.

그러다 봄이 와서 환하고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니까 잔뜩 웅크렸던 어깨가 절로 펴지면서 봄햇살에 눈이 부시는데.

이젠 살았다! 마음이 놓이더라.


가을에 네 부모 떠났지.

단풍이 아름다운 날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

그다음부터는 깜깜해,

아무 기억이 안 나.

그러고 달인가 지나서  첫돌인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지옥 속이니.

그래도 평생 한 번인데 돌상은 차려야않겠냐고,

네 이모가 나서서 돌복도 사 오고 돌상도 차리고 사진사도 불렀어.

그러고도 겨울 내내 할아버지는 나오지를 않,

나도 시름시름 아파서 몸을 일으킬 수 없으니 베이비시터 아주머니가 너를 키우셨거든.

어른들 서글픈 심정과 상관없이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지. 아장아장 걷, 옹알옹알 할아버지 할머니도 부르고, 아기새처럼 밥도 잘 받아먹는데.

겉으로는 아기한테 잘한다, 이쁘 웃고 손뼉 쳤지만

그건 내 허깨비였.

속에서원망이 가득하니 울컥울컥 분하고 억울해서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

그러다 봄이 되니까 마당이 푸릇푸릇해지면서 꽃들이 피어나잖아.

가 자꾸 밖으로 나가자고 .

뒤뚱뒤뚱 마당을 걸어 다니면서 꽃 보면 좋다고 '꼬', '꼬', 하고, 

예쁘다고 까르르 웃고,

코를 꽃에 가져다대서 냄새도 맡아보 입에도 넣고 말이지.

네 덕에 마당에 나가서 하루종일 풀이랑 꽃이랑 지내면서

그 작고 여린 생명들이 온 힘을 다해 꼬물꼬물 이파리를 내고 나날이 자라나는 모습에 차츰차츰 마음이 밝아졌어. 

해마다 맞은 봄이고,

해마다 가꾸던 뜰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풀들이 대단해 보이던지.

'소생'이 이런 거구나,

죽음에서 살아난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풀잎처럼 작고 여린 우리 은 때문에 내가 살아야겠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서 은이를 지켜줘야겠다, 다짐했지.

나중에 저승 가서 네 부모 만나면,

봐라, 이렇게 쁜 은이를 우리가 키웠다, 큰소리 땅땅 칠 거야.



외삼촌께 외할머니 모시려의견말씀드렸다.

병원 측과 외할머니 건강상태를 먼저 논의해야 하고,

외할머니 의견도 중요하며,

외삼촌과 이모의 입장과 형편도 고려해야 했으니.

혹시 마음 상하실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외삼촌도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많이 무거웠는지 고맙다고.

건강 상태나 병원 측 의견 등, 다각적으고려하자고 말씀하셨다.

외가의 결정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은이는 집 근처에 있는 길을 .

미세먼지 없는 화창한 어느 봄날에는

물 한 병과 사탕 몇 알을 주머니에 넣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천을 따라 하염없이 다가 한강까지 이르되었는데.

개천에는 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오리나 백로도 한가로이  떠다녀서

너희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살아냈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옆으로  따라서는 가지 풀들이 파릇파릇 아기 손처럼 올라오고.

노란 꽃, 분홍꽃들이 피어나고,

겨우내 메말랐을 나무줄기에는 푸르스름 물기가 돌면서 연두색 이파리가 돋아난다.

원래 변화 없는 정물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움직이는, 생명 있는 대상을 그리기 좋아하는 은이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그림생명의 역동성을 제대로 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자신이 대상의 외형을 흉내 내는데 치우쳤을 뿐,

대상을 골똘히 들여다보거나 그들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려 하지 않았다,반성 든다.

원래 산과 들에서 살아갔을 풀과 나무는 어쩌다 대도시라는 시멘트 사막떨어져서 혹은 남아서

하루종일 사람들과 소음과 빛과 매연에 시달리면서.

메마른 흙에서 부족한 빛과 물이라는 야박한 환경을 견디며.

또는 그저 사람들 눈이나 즐겁게 하느라 온갖 변형을 강제당하면서.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이파리를 드리우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는 생명의 본분을 힘껏 해낸다.

겨울이 오면 말라버린 껍데기를 벗어내고 오직 본질만 간직하여,

화려한 시절 깔끔하게 지난날로 흘려보내지.

경외심이 들었다.

생명은 정말 대단해.


그날 밤 은이는 도구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골목 어귀 풀과 산과 개천을 걸으며 보았던 꽃, 나무, 풀을 그리고 싶은 의욕이 넘쳐서,

오랜만에 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다.

할아버지께 말씀하셨지.

재능을 타고났다는 건 네가 유용한 도구를 가졌다는 뜻이야.

도구가 없으면 무언가를 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도구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도 없어.

먼저 도구로 무엇을 할 건지,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꾸준하게 노력해야 너의 도구를 제대로 쓸 있단다.


단지 그림 그리는 기능만 연습하는 건 은이에게 맞지 않다.

보기에만 좋은 그림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이제 은이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몹시 마음 끌리는 대상을 찾아냈으니.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환경을 이해하며,

그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생명을 마치는 그들의 고군분투를 그림으로 그려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필요하다면 글과 그림이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겠고.

더 적합한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면 최적의 표현 방식을 찾아내려 여러 가지를 시도할 것이다.

식물에 관한 공부도 해야겠지?

기꺼이,

기쁘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내리라.

갈 길은 멀겠지만.



외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금요일에 병원을 나와 월요일에 병원으로 귀환하시기로 했다.

금요일에는 외삼촌네가 외할머니를 모셔서 토요일 점심까지 외할머니를 돌볼 것이고.

일요일 오후 숙소에 도착한 이모네가 월요일에 외할머니를 병원까지 모시다 드린단다.

그 사이 시간에 은이는 외할머니와 함께  것이다.

외할머니를 모실 숙소로는 이모가 병원 가까이에 작은 오피스텔을 빌리기로 했다.

"안 그래도 서울에 머물 곳을 마련하고 싶던 차였어.

창고에 맡겨둔 머니 물건을 풀어놓으면 어머니도 편하게 느끼시겠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기를.

외할머니 삶의 마지막 심정두려움과 슬픔 아니라,

평온하고 잔잔한, 정다운 일상으채워지 바란다.


은이는 이제 계획한 대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을 것이며.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전시회를 찾거나 거리를 걸을 것이며.

일요일에는 집안일을 싹싹 해낼 것이다.

외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최선으로 외할머니를 보살필 것이고.

밥도 잘 먹고 집을 깔끔하게 치우며 멋도 부릴 겁니다.

내 몸이 튼튼하고 내 마음이 평온해야 하고 싶은 일들을 또박또박 잘 해낼 수 있으니까요.


느리게 가더라도 방향은 잃지 않기를.

때때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기를.

차근차근, 차곡차곡.

나의 생명에 충실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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