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에 대한 기억

내가 지나쳐온 곳

by 기차는 달려가고

인구 통계를 봤더니 내가 태어난 해에 등록된 서울 인구는 245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어릴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전차 탔던 기억이 있다.

큰 태풍으로 부엌까지 물이 찼던 일도,

동네 개천 너머 푸르렀던 뒷산이 온통 루핑을 씌운 판잣집으로 뒤덮여가는 과정도 지켜봤다.


서울 주변 경기도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열고,

지하철 1호선, 2호선이 차례차례 개통되고.

고가도로가, 여의도 아파트 촌이, 강남 개발이.

인구, 면적, 도시의 외양과 기능에서 서울은 엄청나게 바뀌어왔다.

서울 안에서, 구성원으로 변화의 흐름에 들어 있으니 그러려니 받아들였지,

지금의 서울은 내가 자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다.

그럼에도 서울은 늘 같은 서울로 여긴다.



20대 초, 내가 한창 외부로 시선이 쏠렸을 때.

아버지는 서울도 인구나 규모에서는 국제 도시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보지도 못한 서구의 대도시들-뉴욕, 런던, 파리 같은- 의 사진을 떠올리면서

그럴 리가요, 했었다.


나의 성장기는 우리나라 경제가 급속도로 물량을 키워왔던 시기였다.

집 밖으로 나가면 누추한 거리와 초라한 사람들의 모습이 쉽게 보였지만,

사방이 공사판이어서 지금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당연히 기대했던 것 같다.

서울은 만원이다, 서울은 공사 중,

이라고 나날이 복잡해져 가는 서울을 표현했는데.

사람들은 서울로, 서울로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우리 어릴 때는 거리에 상이군인들이 참 많았다.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퉁명스럽게 물건을 사라 하고.

절뚝거리며 가게에 들어와서는 팔이 없는 빈 옷소매를 흔들면서 돈을 달라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어른들을 따라 시내에 나갈 때는 신문로를 지나갔는데,

사람 팔과 다리 모양을 한 기괴한 제품들이 진열된 가게들이 여럿 늘어서 있어서,

'의수', '의족'이라 쓰인 간판이 달려있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경원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이 떼쓰는 아이들을 겁 줄 때,

그들을 팔았다.

말 안 듣는 애들 데려다가 잡아먹는다고 말이지.



곳곳에 크고 작은 공사판이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길을 내고, 집을 짓고, 다리를 놓는 공사판에서,

맨몸에, 맨손으로 등에 진 지게에 벽돌, 철근, 시멘트를 날랐다.


쓰레기를 치우는 분들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 새벽이면 집집마다 담벼락에 붙은 쓰레기통의 외부 뚜껑을 열고,

꽝꽝 언 쓰레기를 삽으로 깨서 수레에 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수거된 쓰레기들은 난지도로 갔는데,

온갖 쓰레기들이 썩어가는 난지도에 사람들이 들러붙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모은다고 들었다.


대학교 때 선배는 나를 영등포 공장지대의 어느 교회에 데려갔었다.

행사가 있었다.

코러스가 노래를 불렀다.

아마 "공장의 불빛" 그런 류의 노래였겠지.

우리 대학교 때 동창들은 시위하다 경찰서에 종종 끌려다녔다.



지금 그들은 이 사회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지내는 것 같다.

지위를 얻은 분도,

우왕좌왕, 힘들어하는 분도 있는데.

누구도 행복하다는 말은 없다.

분명한 건 너무들 멀리 갔다는 점.

모이면 어른들의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

사회생활의 모순을 견디면서 얼마나 마음의 갈등으로 힘들어했을지 그 괴로움을 모두 짐작할 수는 지만.

정의와 평등이라는 꿈과 이상을 내다 버리고 이익에 줄 서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는 사회였다면,

그 길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은 불타는 천 길 낭떠러지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심정이었으리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느 가게 여주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