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은이
여의도에 다녀온 밤부터 은이는 많이 아팠다.
추위 속에서 긴 시간 오들오들 떨었으니 감기가 그냥 지나칠 리 없지.
게다가 발에 붙인 핫팩으로 화상까지 입었다.
콧물과 기침에 고열로 벌건 얼굴에,
아기 주먹만 한 물집까지 발에 달았지만.
탄핵안 통과의 순간을 같은 뜻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환호했던 감격은 잊을 수 없어요.
끙끙 앓으면서 낮과 밤 구분 없이 자다 깨다.
정신이 들면 땀으로 축축한 잠옷을 갈아입고 물을 마시고는 다시 잠들었다.
배고픔이 느껴지면 부엌으로 나가 따뜻한 물에 꿀을 듬뿍 덜어서 미숫가루를 타먹거나.
누룽지를 끓여서 명란젓이나 낙지젓이랑 먹었는데.
배고프니 뭐라도 먹긴 했지만 입이 까끌까끌하니 맛이 안 느껴지는, 은이로서는 드문 경험이었다.
그래서 식사보다는 따끈하게 매실청이나 유자차를 마시거나.
사과나 오렌지 같은 과일을 깎아먹었다.
처음 며칠은 보리차 끓일 힘도 없어서 생수를 마시다가,
조금 회복되어서는 물을 끓여서 티백 우엉차를 마셨다.
집을 둘러보면 물건은 흐트러지고 빨랫감이 쌓여서 마음이 안 좋았지만.
아, 정말 어질러진 집은 싫은데요,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네요.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 몸이 가쁜해졌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방을 청소한다.
이불커버와 시트, 베갯모를 바꾸고,
쌓인 빨래 하느라 세탁기를 두 번 돌렸어.
무거운 빨래더미를 떠안은 건조대 고생함.
저녁에는 모처럼 밥을 짓고 찌개를 끓였다.
소고기와 키조개 관자를 넣은 된장찌개.
애호박, 버섯, 두부에 고추까지 큼직하게 썰어 넣고.
된장을 더, 고추장 조금 넣어 건더기가 많은 찌개를 바글바글 끓여서.
갓 지은 흰쌀밥에 찌개 국물 조금, 건더기 많이 얹어 쓱쓱 비벼먹으니까.
우아, 물개박수 세 번.
음식이 입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간다.
배불러, 배불러, 하면서 계속 먹는 은이를 보셨다면,
할머니는 아마,
하하,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하셨겠죠.
은이가 맛있게 저녁을 먹은 그 시간.
여의도에 함께 갔던 친구들은,
헌법재판소에 대통령의 파면 결정을 촉구하는 광화문 집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계엄의 밤 이후,
은이도, 친구들도,
개인적인 일에는 거의 집중하지 못하고,
낮이나 밤이나 온통 뉴스와 정세에 주의가 쏠려있다.
자다가도 깨어 휴대폰에 코박은 심정을 아실까요?
이제나 저제나, 어서 비정상이 사라지고 상식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통령 파면 촉구 집회에도 참석하고.
수없이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면서 새로운 뉴스가 없는지 찾아본다.
집회를 마치고 다른 친구들은 집으로 갔는데,
한 친구는 남태령으로 갔다.
남쪽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고 있는 농민들이 모는 트랙터 행렬이,
남태령에서 경찰에게 막혀있다는 거다.
엄연히 법원의 허가를 받아 경찰의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몇 날 며칠을 서울을 향해 오는 정당한 행렬인데,
대체 무슨 근거로?
누가 명령했대?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보해 온 걸까요.
19세기 유럽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할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었다.
글쎄.
네가 읽는 그 책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서,
언젠가는 불행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지.
18, 19세기 서구에서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이 발달하면서 서구 제국들은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식민지배로 민관이 얻은 이익도 큰 몫을 했고.
어쨌든 서구 국가 안에서는 민주주의 체제도 한걸음 한걸음 진전되었어.
하지만 그 시대 산업과 사회 발전의 혜택을 본 사람들은 전 세계 인구 중 극히 일부분.
넓은 바다 위를 떠도는 나무 이파리 하나만큼이나 됐을까.
물질적으로 융성해서 도시는 나날이 화려해졌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했고.
제국주의 나라들한테 지배받았던 식민지 현실은 말할 것도 없이 혹독하고 비참했지.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을 자신들과 절대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어.
자신들의 이익 구조를 지키기 위해 나쁜 짓은 다했고.
이런 잔혹한 행위를 가리기 위해 과학의 탈을 씌워 별의별 거짓말을 해댔지.
우리나라는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기아와 독재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얻었어.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동시에 또 다른 문제들이 계속 누적되고 있구나.
사람들은 종종 실망스럽고.
공공성을 지켜야 할 언론, 검찰, 사법부, 정치인, 고위 관료들에 재계에 여러 전문집단들까지,
지독하게 이기적인 태도와 부도덕한 가치관이 심각해.
직업윤리나 책임감 같은 가치는 내팽개치고 오직 사적인 욕망,
그러니까 지위와 부유함만 갈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공의 자산으로 자기들 재산만 불리면서 썩어가고 있지.
평소에도 그랬지만 기득권층의 위선의 레토릭이 더, 더 날뛰고 있다.
하느님, 예수님의 길을 전혀 따르지 않는 자들이 하느님, 예수님은 엄청 팔아먹고.
국민, 시민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 입만 열면 국민, 시민 타령이다.
위선과 거짓을 일상적으로 떠들다 보니 스스로 세뇌됐는지
자기 호주머니에 돈 찔러 넣으면서 하느님 사업을 외치고,
업자와 짬짜미로 자기 재산 불리면서 국민 위해서라네.
이성이나 양심, 염치와 부끄러움은 아예 탑재된 바 없이
오직 살아남으려는 비루한 욕망으로 아귀다툼할 뿐인 그들은,
남의 돈으로 유흥하고,
나랏돈으로 비싼 차 타고,
지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재물을 늘리고.
굽신굽신 대접받는 것으로 성공한 자신을 확인하면서 으스대지만.
내심은 그 성공이 진짜일까 믿기지 않는지 영 불안해하는 중이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익을 얻어온,
공고한 자기들만의 먹이 사슬에 위기가 오겠으니,
지금 난리도 아니야.
번지르르한 겉과 다르게 아마 그 내면은 여전히 지독한 열등감과 결핍감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저렇게까지 염치도, 부끄러움도 없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오직 돈과 지위만 쫓다니, 의심스럽잖아.
자신을 휘감고 있는 깊디깊고 불행감에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존재 자체로 눈부신 정직한 이들,
올바르기 때문에 떳떳한 이들,
선량한 국민들과 나라의 앞날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실행하여,
높은 지지를 받는 몇몇 인물-을 몹시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잘난 너네들, 완전히 부숴놓겠어!
광포하게 짓밟는다.
그런다고 오물통에 흠뻑 빠진 저들이 찬란한 빛 속으로 나오지는 못하리.
수천 명 경찰은 남태령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이 매서운 추위에 노상에 갇혀버린 농민들은,
경찰에 둘러싸여 추위에 덜덜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현장으로 달려간 친구는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고,
국회의원들도 도착했으니 통행금지가 곧 풀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하기도 했지만.
밤이 깊어지도록 달라지는 건 없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휴대폰 배터리까지 떨어지려 해,
이대로 밤 새야 하나 봐...
하는 전갈에 친구 하나가 남태령으로 가기로 한다.
아버지가 데려다주신대.
담요랑, 뜨거운 물이랑, 핫팩, 보조배터리, 먹을 거 다 들고 갈게.
남태령의 밤은 정말 춥고 암담했는데.
1980년대, 군부독재 시대에 갇혀버린 내란세력은 모르겠지만.
세상이 바뀌어 지금 차벽에 갇힌 시민들은 모두 1인 미디어가 되어,
밤새 애태우는 전국 각지의 무수히 많은 시민들에게 현장 소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중이고.
남태령으로 직접 달려가는 사람들로 현장에는 시민들은 계속 늘어났다.
뜨끈한 마실 것, 배부르게 먹을 것, 핫팩, 담요에 일회용 보조배터리 등등 필요한 물건들이 끝없이 도착했다.
한밤중에 온통 가로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서,
또 한참을 짐을 지고 걸어서 기필코 물건을 전달하고야 마는 배달기사님들, 최고!
그리고 따뜻한 버스 안에서 잠깐이라도 몸을 녹이시라고 어떤 분이 보내주신 난방버스는,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 낸 놀라운 창의력이었다.
춤과 노래로 추위를 견디는 흥겨운 밤은 아무도 외롭지 않았다.
농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 경험하는 시민들의 관심에 기쁘고 놀라서 울먹이는 농민들을 보면서,
그간 우리가 농민들이 처한 상황이나 어려움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반성했고.
그 무겁고 침통한 상황에서 지치지 않고 해학과 흥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우리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우리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커지고.
그 자부심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는 낙관적인 믿음이 쑥쑥 자란다.
그렇게 연대와 협력으로 마침내 승리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한강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28시간의 악전고투.
강물은 바다로 직진하지 않는다, 고 했다.
굽이굽이, 한 고개 두 고개,
지치지 않고 끝까지 흐르다 보면
마침내 푸른 바다에 이를 수 있겠지
동짓날 밤.
어둠이 가장 깊은 날.
동시에 낮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