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은이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조마조마한 시간,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와 불안감을 견딘,
여의도를 빽빽하게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환호성을 올렸다.
추위로 감각을 잃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느라 목이 잠길 지경인데.
다들 눈물이 글썽해서 복받치는 감격으로 기뻐한다.
이날이 오기까지 3년 가까운 시간.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나라는 또 얼마나 망가졌는가.
까르르르,
연신 웃음이 터진다.
반짝이를 붙이다가 키득키득.
여기 삐뚤어졌어, 라든가,
멀리서 보면 몰라, 티격태격하다가 우헤헤헤.
명랑함과 유쾌함이 흘러넘쳤다.
채소와 버섯을 볶고,
닭볶음탕을 끓이느라 부엌에서 바쁜 은이를,
"이리 좀 와봐!"라든가,
"어떤 색이 더 나은 지 봐줘."라는 친구들의 호출에,
은이는 급히 물 묻은 손을 닦으며 부엌과 방을 들락거렸다.
이제 모락모락 김 오르는 밥이 완성되었으니,
"밥 먹고 하자."
친구들은 하던 작업을 옆으로 밀어내고 상에 수저를 놓는다.
어제저녁에,
오늘 국회의사당 앞에서 휘두르려고 주문한 깃발을 배송받은 친구가 톡에 깃발 사진을 올렸다.
뭔가 모자라다고.
주문할 때는 비분강개해서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을 주장하려는 마음으로 디자인했는데.
막상 완성되어 보니 너무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다는 거다.
좀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기발한 아이디어 좀 내봐! 하는데,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나오란다고 톡 튀어나오겠나.
지금도 나쁘지 않아, 의미 있잖아.
확실히 비장미는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강압적으로 국민들을 위협하는 마당에 헌법을 크게 외쳐야지.
누가 주권자인지.
그래도 친구는 재미난 깃발을 들고 싶다는 거다.
그러다가 다른 친구가 스팽글, 레이스 같은 장식재료가 한 보따리 있는데,
그걸로 장식하면 어떨까?
그리하여 오후에 여의도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은이 집에 모여서 깃발을 장식하게 됐다.
예정보다 이르게 집을 나왔으니 친구들은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겠지.
강바람이 세찬 섬, 추위가 닦친 이 날씨에.
캄캄해지는 저녁까지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몇 시간을 있게 될지 기약이 없으니.
든든히 먹고 가야 해.
밥 신봉자 은이는,
급히 닭과 채소들을 주문했고.
새벽에 받아서 지금 닭볶음탕을 끓이고 있다.
무능과 범법,
탐욕과 무식,
입만 열면 거짓말에, 남 탓에,
무책임하고, 파렴치하며, 극악한 데다 야비함까지 더한
부패와 비열... 폐급인간의 표본.
봐줄 만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악한 권력자가 어쩌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버리니.
매일매일 그 패거리가 저지른 범죄혐의를 줄줄 읊을 생각은 없다.
내 입이 창피해지니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대통령이라는 직무에 대한 이해도, 인식도 전혀 없는 부분이라고 은이는 판단한다.
국정이라는 업무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국정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다.
권력을 손에 쥐었으니 맘껏 휘두르자!
내 주머니부터 잔뜩 채우고.
나랏돈 신나게 써대기.
그저 고급술에나 취해서- 저도 맨 정신으로는 힘들겠지,
성질나는 대로 호통이나 쳐대고,
그럴듯해 보이는 뭔가를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
머리 꼭대기에 붙어 앉은 악귀의 조종을 받는 그 자는,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군대, 공직 체계, 의사 결정 과정에 더해 논의와 합의 같은 국가 운영체제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네.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개념은 아예 탑재조차 돼있지 않은,
그동안 사리사욕으로 공직을 차지해 온 부류였다,
그가 속해있던 공적 직함을 내세운 사악한 패거리들은,
정당하게 지적하는 올바른 이들을 발로 밟고 짓이기면서, 극단의 위협으로 정의를 파멸시키는 무도하고 횡포한 망나니들이다.
온갖 저열한 인간들이 비루하게 날뛰는 행태를 실시간으로 목격해야 했던 괴로운 시간을,
그럼에도 속수무책,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던 비참한 이 현실을,
제발, 끝내자.
기필코 오늘은!
간절한 염원을 안고 우리는 국회로 간다.
오늘은 되겠지?
되게 해야지!
결의로 용기 충만하다가도.
불쑥불쑥 이번에도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치솟는다.
나라와 정의에 대한 헌신 없이 자기 이익만 셈하는 정치인, 사법부, 의 작자들이 발목을 잡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과연, 오늘은 국민의 염원을 따라 국회는 주어진 소명을 엄수할 것인가.
불안과 싸우며 이 순간을 기다렸어.
간절히 기도했지.
탄핵안 통과-
오늘부로 대통령 업무는 중지되었다.
첫 관문을 넘었다.
목청껏 탄핵을 외치고,
두 팔이 떨리도록 민주공화국 깃발을 휘두르며.
반짝반짝 별처럼 빛나는 응원봉을 흔들었지.
책임지는 성인이 된 느낌이야.
훌쩍 자란 기분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도록 시민으로서 내 몫을 하자.
세차게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한강 다리를 걸어가던 사람들.
혼자, 낱낱으로 점점이었던 사람은,
줄줄이 어어지는 선이 되었다가
광장을 꽉 채운 면이 되었다.
발 붙일 곳만 있으면 빽빽이 들어찬 남녀노소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공감과 연대를 이루어냈다.
이 나라의 주인인 우리.
주인의 권리와 주인 된 자의 책임감으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거야.
란을 일으킨 자,
국민을 짓밟는 자,
그대로 둘 수 없거든.
잘못을 바로 잡고 옳은 길로 향하자.
선결제를 하면서 누군가는 또 누군가에게 따끈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떡과 어묵을 나누었으며.
밥을, 핫팩을, 갖가지 일용품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보냈다.
가족이 여행 갈 비용으로 버스를 대절해 어린아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한 젊은 부부가 있고.
해외에서, 국내에서,
제법 큰돈 또는 용돈을 털어 광장의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았다.
음료와 음식 선결제가 쏟아지니 이를 먹을 수 있는 업장들을 표시한 앱을 누군가가 만들어 공개했고.
몇몇 건물들이 시민에게 화장실을 개방했지.
그러니 또 어느 능력자가 이용 가능한 화장실을 표시한 앱을 만들었어.
물질로, 재능으로,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서로 도우면서 이 순간을 만들어냈구나.
모든 순간이 특별했다.
기쁨의 축제였어.
힘차게 휘날리는 깃발들과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색색의 응원봉들은,
그 안에 담긴 우리의 간절한 염원.
오늘의 뿌듯한 이 장면들은 마음 깊이 새겨져,
두고두고 우리의 자부심이 되겠지.
좋은 나라를 이루고야 마는 그날까지 절대 지치지 않기.
그날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은 모처럼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뜻을 같이한다는 강한 일체감을 느끼고는 울컥했다.
계엄령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국회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과
국회를 점령하려 온 완전무장한 계엄군을,
맨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의 마음은 하나였으리라.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국민을 이용하고 군림하려는 위선자가 아니라.
정정당당한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국민의 요구를 받들어 대의에 헌신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국민의 대표로 선택하고,
유심히 그들의 정치 활동을 지켜보며.
올바른 활동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은이는 다짐한다.
식민지와 독재정권에서 오늘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이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희생됐을까!
책으로만 읽었던 그분들의 절망과,
멸사봉공한 의로운 이들이 겪었을 고초와 외로움을 확실히 체감하는 몇 년을 지나면서,
은이는, 고맙습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그 더럽고 음침한 어떤 것을 조금이라도 벗겨낸 오늘의 성취가,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한 답답한 이 현실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믿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