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시민 은이

by 기차는 달려가고

드디어 더위가 물러났다.

참으로 지독하고 끈질겼던 2024년 여름은,

시간의 흐름에 쫓기면서도 한참을 미적거리더니.

10월에 들어서고도 중순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계절 저편으로 사라졌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은이는 기운을 되찾았다.

밥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라 하루 세 번,

고급 음식점의 수석 요리사라도 되는 양 진지하게,

밥과 반찬과 국물을 갖춘 알찬 밥상을 차려서는.

앞치마를 풀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밥상에 앉으면,

마치 웨이터의 대접을 받는 손님 마냥 한 숟가락, 한 숟가락.

꼭꼭 맛을 음미하고,

차와 후식까지.

느긋하게 밥상의 여운을 누렸다.


은이는 음식의 맛은 물론 밥을 먹는 시간, 그 자체를 즐겼다,

밥을 먹는 행위는,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는 에너지를 얻는 신체 과정인 동시에.

미각과 후각, 시각과 위장의 포만감으로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정서적인 행위이고.

정신과 육체의 휴식이며,

재충전의 시간이다.

은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했던 그 밥상을 참으로 사랑했는데.

할머니가 정성을 다하신 그 음식들은

맛과 건강 면에서 더할 나위 없기도 했지만.

은이는 그 맛있는 음식 말고도

모두가 둘러앉은 밥상에서 도란도란 나누던 일상의 이야기와,

서로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주고받은.

서로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이 지극히 소중해서.

지금 혼자 먹는 밥상에서라도 은이는,

여전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주신 사랑과 돌봄을,

스스로에게 건네는, 그런 마음이 된다.



기운을 차리면서 다시 식물을 보러 나갔다.

봄은 넘치는 활력과 그 생동감으로 경이로웠는데,

가을의 식물에서는 어떤 경건함이 느껴졌다.

큰비 내린 뒤 개천을 보러 나와봤을 때,

아직 여름이 기승을 부릴 때라서 나무와 풀은 제각각,

그 빛깔과 크기와 숫자로 화려함을 자랑했었는데.

은이는 살짝 두려움이 일 정도로 왕성한 그들에게서 어쩐지 이제는 한 발 내려오는 느낌이랄까.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물러난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래.

가을의 풀과 나무는 성숙하고 멋지다.

무게를 내려놓고.

부피도 떨구면서,

죽음을 준비한다.

이제 나는 삶의 저편으로 홀연히 떠나가니,

찬란했던 시절이여 안녕.

미련 따위는 남기지 않고 훌훌,

이파리를 떨궈낸다.



은이가 하는 작업은,

바쁘거나 고되지는 않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몰두하여 진심을 쏟아야 하는 일이고.

살림은,

혼자 사는 1인 가구로서 어려운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심하게 몸만 움직여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욕적으로 집을 치우고 살림을 정돈하고 밥상을 차리려면,

적어도 은이로서는,

휴식으로 충전해 가뿐해진 신체와

혼자 조용히 보낸 시간으로 평온한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집안일에 전력을 쏟을 수 있지.


나는 일상의 모든 것을 사랑해.

밥상을 정돈하여 수저를 놓고 음식을 차리고.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는,

차례차례 빈 그릇이 물러나고.

최종적으로 행주로 밥상을 닦는 일련의 행위,

- 이루고 사라지는 과정.

방에, 가구에,

매 순간 사각사각 먼지가 쌓이고,

이를 닦아내는 번번이 반복되는 행위가

- 마치 하나의 공연 같다, 고 은이는 생각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채워지고 비어 가는 반복되는 과정.

지루할 수는 있으나 의미 있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열심한 마음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의 반복으로 세월이 흐르듯

인생은 먹이를 구하고 음식을 먹고 청소를 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하며 손을 잡고 손을 놓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들로 인생의 내용이 채워진다, 고 은이는 생각해 다.


무대 위에 설치하는 연극 세트는,

극장 뒤편에서 세밀하게 조정되는 조명은, 음향은,

결국 이야기가 전개되도록 돕는 단지 장치일 뿐.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연극의 본질은 전하고 싶은 진실이나 나누고 싶은 아름다움,

눈에 보이지 않고,

형상으로 남지 않는,

추상의 의미와 순간의 공감일 거였다.

인생은 매일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고.

그러니 아침부터 밤까지 이루고 사라지는,

순간에 충실한 반복되는 행위들이 내 삶을 지탱하리니.

장치의 역할을 인식하여 적절하게 배치하고 활용하되 그것에 매몰되지는 말자.


이루고 사라지는,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모든 순간들.

그 허무하고 처연한 아름다움.

일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사라지는 일상의 이야기를 은이는 사랑해.



하루가 지날 때마다 뚝뚝 기온이 떨어졌다.

여름의 흔적을 치우고

겨울을 준비하면서 은이는,

공간을 채운 이 물건들이 너무 많아,라고 느꼈다.

뭔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을 레일 없는 들판으로 가져왔듯이,

그래서 제도나 선례나 사람을 대로 따라가는 대신,

오직 은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꾸려가기로 마음먹었 듯.

생활 방식의 일부라도,

일종의 실험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물건으로 살아볼까 해,

먼저 옷과 가방, 신발부터 줄이려고.


은이의 선언은 같은 심리 상태에 있던 친구들을 모았고.

그래서 서로 물건을 바꾸고 또 기증하는 작은 행사를 열게 되었다.

이상기후에서 보듯 환경 문제가 몹시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는 않지만.

기업이나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진심으로 인식해 유효한 해결책을 실행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용산의 무식, 무능, 무책임한 탐욕의 패거리는,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단계조차 마음껏 방해하는 중이라서.

그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들부터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고 친구들은 의견을 모았다.


쓸 만한 물건들만 깨끗이 손질해서.

일부는 서로 교환하고.

대다수 물품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도록 기증했다.

이왕 나선 김에 친환경적인 생활도 실천하자고 약속했는데.

빵이나 과자를 먹고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를 그냥 버리는지,

아니면 일일이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는지,

- 매번 다 먹어치울 수는 없으니까요.

, 하는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사소한 문제들.

일회용 키친타월을 쓰고 버리는 편이 환경에 더 나쁠까,

행주로 닦고 세제를 써서 빠는 편이 과연 친환경적일까, 하는.

어느 쪽이 맞다고 단언하기에는 애매한 문제들을 토론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는 디지털 디톡스가 급하다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붙들고 쓸모없는 정보까지 구겨 넣는 시간만 줄여도 머릿속이 훨씬 맑아질 거라는 친구의 말에,

다들 적극 동의하면서.

생활 방식을 되도록 친환경적으로 하는 동시에 디지털 디톡스도 실천하자고,

친구들은 입을 모았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무엇보다 배가 든든해야 하니 치킨과 족발을 주문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다들 팔 걷고 나서서 김밥을 말고,

매콤 달콤한 떡볶이에,

뜨끈뜨끈한 어묵탕을 끓였으며.

달달한 고구마는 찌고,

알토란 같은 밤은 구웠다

간식거리로는 호박엿과 볶은 검은콩.

사과도, 포도도.

차가운 식혜와 뜨거운 생강차도 준비했지,


행사를 끝내고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행사장을 말끔하게 치우고 쓰레기까지 내보낸 뒤에,

운영을 맡아 고생한 친구들이 둘러앉았다.

남은 음식을 먹으면서 친구들은 밤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한동안 잘 지켜지던 작업과 살림은 이번 행사 준비로 다시 휘청거렸는데.

그래서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결심한 은이는,

부끄럽지만 친구들에게 자신이 해보려는 작업 내용을 이야기했다.

작업에 좀 더 집중하고,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으려면,

스스로 시간표를 지키고 시간을 아낄 필요가 있어.

은이가 짠 생활 계획표는 이러했다.

- 일주일에 최소 두 번, 식물 관찰하러 나간다.

그날 오후 또는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기록을 정리하고 참고 서적을 찾아 읽을 것.

식물이나 생태 전문가들의 관련 강의 또는 강연을 찾아다니겠으며.

전시회에도,

책 읽기에도 시간을 더 쓰겠다.

그렇다고 생활에 소홀하기 싫으니,

매주 일요일에는 일주일 치 먹을 것을 준비하고,

매일매일 일과를 정해서 깔끔하게 살림할 각오-라는 자신의 포부를 말하며.

그래서 친구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만나겠으니,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를 구합니다, 이상.



가을은 추수의 계절.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에 희망의 씨를 뿌려서.

뜨거운 여름날,

땀 흘려 밭을 가꾼 이들이 결실의 기쁨을 누리겠지.

하지만 그 결실이 반드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성공이나 명예는 아니야.

그런 결실은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부산물이지.

공들여 어딘가를 향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고 은이는 생각한다.

그 과정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인식이 깊어지며,

내면이 성장하고 인식이 성숙해지는 거.

그래서 자기라는 한계를 확장하면서,

본질에 집중하고 헛된 것에서 자유롭고 홀가분해지기.

이런 것들이 충실하게 살아낸 자가 누릴 수 있는 진짜 결실이 아닐까?


은이는 묵묵하게 자신의 밭을 가는 농부처럼,

진인사대천명, 을 마음에 새기겠다고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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