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by 기차는 달려가고


우리 엄마는 1931년 생, 89세가 되셨다.

비교적 초기 담도암으로 83세에 수술받고 항암 치료한 지 5년 만에 암은 온몸의 뼈로 전이되었다.

통증 관리 외에는 치료도 불가능한 상황.

어머니는 한 달 뒤를 예측할 수 없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다.



나는 60 평생 엄마라 부르고(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로부터 이름이 불리는(불릴 만한 다른 호칭이 없어서), 함께 살아온, 결혼 안 한 딸이다.

내 어머니는, 지금 당신의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시는 병든 노인이 되었다.

딸은 보호자가 되어 엄마를 돌본다.

한없는 열성과 뛰어난 솜씨로 평생 입맛 까다로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맛있는 밥상을 차리셨던 어머니는,

이제는 당신 솜씨에 훨씬 못 미치는 딸이 차리는 밥상을 받으신다.

병이 깊어 입맛은 떨어지고 몸도 음식을 못 받아, 먹는 것에 흥미를 잃은 어머니(딸의 부족한 경륜과 정성도 한몫하겠지).

오늘도 딸은 어머니를 위한 밥상을 차리고, 어머니는 침대에서 힘들게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휠체어타고 식탁에 앉으신다.

싫증이 난 또는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이런저런 메뉴를 다 빼고 그나마 드시는 몇 안 되는 식재료를 쥐어짜 낸 간소한 밥상.

어머니는 소꿉장난처럼 차려진 새 모이 같은 식사를 하시고 한 움큼 약을 드신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딸이 차리는 밥상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수 십 년,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아름다운 밥상들을 떠올리고.

집에 가득했던 가족들이 하나씩 집을 떠난 뒤 둘이 남아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딸과 어머니에 대해서.

병든 노인의 삶에 관해서, 여전히 하루하루를 지탱해 주는 소소한 생활의 즐거움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집 음식들에 기대 풀어봐야지.



* 덧붙임-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

는 우리 집에서 거의 가훈급으로 추앙받는 속담이다.

먹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먹은 게 시원찮은 날은 잠을 못 이룬다.

세상이 점점 흐릿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싶으면

아까 먹은 밥상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거다.

먹어야 산다!

그것도, 잘!


그래서인지 때깔은 괜찮은 편이다.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어머니는 ‘예쁜 할머니’라며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를 받는다.

본인도 좀 즐기는 눈치.



- 흔한 환자의 밥상;

영양제, 다쿠아즈, 과일


강한 진통제로 배가 부를 지경이지만 한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이 드신 어머니는, 새벽녘이면 몸을 짓누르는 괴로움으로 잠이 깨신다.

몽유병 환자 같이 비틀거리며 자기 방에서 나온 딸은,

식어버린 찜질팩을 다시 데우고 굳어진 어머니의 몸을 조물조물 마사지한다.

한참을 힘들어하시다 날이 밝을 때쯤 쌔근쌔근 잠이 드신 어머니.

따듯한 햇살이 방 깊숙이 비출 때 어렴풋이 정신이 들어 TV를 켜시는데.

이때 안방에 등장하는 부스스한 딸은 아침 약을 드셔야 하니 뭐라도 먹어야 한다며 커튼을 걷는다.

입이 깔끄러워 도통 음식이 넘어갈 상태가 아닌데 말이지.


딸은 어머니 침대 발치에 놓인 테이블에 아침상을 차린다.


환자를 위한 경장영양제 한 봉지.

병원에서 처방받아 약국에서 구입한다.

양에 비해 열량이 높고, 씹을 일 없이 술술 마시는 데다.

소화도 괜찮고, 영양소는 골고루 들어 있다.

제품마다 맛에 차이가 있어, 어머니는 특정 제품을 선호하신다.


부드러운 다쿠아즈 한 개

(입에서 녹는다. 칼로리가 높다, 이삭 줍기로 최소한의 영양분을 확보해야 하는 입장에서, 감사!)

그런데 오늘은 "달아"라고 하셨다.

그 한 마디에 아이고, 이것도 싫증 나셨나, 딸은 가슴이 철렁한다.


그리고 얇게 썬 과일.

바나나, 아보카도, 토마토, 무화과, 딸기, 블루베리, 포도, 감귤 종류, 키위 종류, 망고, 여름에는 수박... 등등 몇 가지 선호하는 과일을 번갈아 드시는데.

오늘은 바나나와 골드키위 당첨.

딸이 차려놓고 간 아침상은 TV가 보여주는 이국의 풍광과 함께 불편한 손놀림으로 오물오물 드시겠지.


소화 능력과 치아 문제로 씹는 음식은 못 드신다.

잇몸에 부담이 가면 곧 그 음식을 거부하신다.

채소는 거의 못 드시니 대신 채소와 과일을 간 것, 각종 과일 주스, 선호하는 과일 몇 가지를 드신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입이 짧아 외할머니께서 밥 먹이느라 고생이 많으셨다는데.

다행히도 다양한 음식,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강하셔서 새로운 음식을 권하면 궁금하니까 시도는 해보신다.

그러면서 당신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아내는데.

오늘 맘에 들었다 해서 언제까지 그 음식을 애정해주시는 건 아니다.



엄마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왕이야.

한번 밥상에서 인사받은 것으로 만족할지. 아니면 어머니 입맛에 간택되어 몇 번 더 상에 올라줄지.

새로운 음식을 상에 내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어머니 표정을 살핀다.

아, 제발 오늘 맘에 든 이 음식은 천일의 앤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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