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곶감 말리는 풍경 보니까 옛날 생각나더라.”
거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잎을 떨군 나무들이 늘어선 앞산을 바라보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 생일 무렵이면 감이 말랑말랑하게 말라서 하나씩 뜯어먹기 좋았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던 딸이 대꾸했다.
거실 베란다 천정에서 줄줄이 매달려 말라가던 감들.
딸은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오르락내리락, 물기가 말라 쫄깃해지는 감을 실에서 풀어 홀랑홀랑 입에 넣었다.
“벌써 40년 전이야.”
딸은 나이를 밝힐 때가 되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이를 헤아려 정확한 숫자를 말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나이가 실감 가는 건 아니다.
“그때가 좋았어. 좋았던 시절이었어.”
어머니께서 중얼거린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들.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던 마당 있는 동네.
(사실 여부야, 음) 공기 좋다고 소문난 동네라 그때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을 따 먹었었다.
(서울 공기가 더 나빠진 나중에는 보기만 했다.)
내 생일 무렵, 그러니까 목덜미가 써늘해지고 첫추위가 몰려올 때쯤이면.
나무들은 매일매일 이파리를 떨구고 마당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인다.
아침이면 느긋하게 밥을 먹다가 학교 갈 시간에 늦어 대문을 열어젖히고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을 뛰어 내려가는데.
부지런한 아랫집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쓸어 모은 낙엽을 태워서 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지금은 불법인 걸로)
타닥타닥 불꽃은 매캐한 냄새를 날리며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담장 위로 이파리를 떨군 검은색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주황색 감들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 나무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까치 한 마리까지.
늦은 가을, 동네 풍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우리 집에서는 단단한 감을 따서 항아리에 담아 홍시를 만들거나 껍질을 벗겨 곶감을 만들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비스듬히 거실을 밝히는 오후.
식당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집안일을 돕던 아주머니가 둘러앉아 잔뜩 쌓인 감을 깎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른 집에 돌아온 집순이 딸은 거실 소파에서 뒹굴뒹굴 책을 읽었다.
가끔 감 깎기 노역에 참여해 감을 나르거나 쌓인 감 껍질을 치우거나 하는 기특한 일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일일이 도시락을 싸야 했던 시절.
그때는 식구가 많아 밥도 많이 했고, 빨래도 많았고, 청소할 집도 넓었다.
집에는 아버지 손님, 아이들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고,
아버지와 아이들은 세 끼에 더해 꼬박꼬박 밤참까지 찾았다.
어머니는 어느 한 끼 소홀함 없이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늘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마련해두셨다.
“그때는 일도 많았고 걱정도 많았지만 나빴던 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그립구나.”
몸 상태가 좀 괜찮은 날.
점심을 드시고 어머니는 딸이 집에서 볶은 원두를 갈아 진하게 내린 커피 반 잔에 꿀을 넣어 드신다.
오늘 같이 기분도 좋고 차분한 가을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축복받은 날이면,
당신의 아픈 몸, 자식들 걱정,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한 지금의 근심거리들...
삶의 무게는 훌훌 털어버리고 그냥 이 좋은 볕과 아름다운 하늘과 야트막한 산들이 그려내는 평온한 풍경을 누린다.
옛날 얘기, 아주 옛날 얘기를 풀어놓기도 하고- 100번은 들었을-.
다큐멘터리를 즐겨보시는 어머니는,
먼 나라의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를 TV를 보지 않는 딸에게 길게, 길게 전하신다.
그 날 모녀는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대통령 관저, 한옥 처마에 조롱조롱 달려 있던 주황색의 곶감이 불러온 옛날 생각에 잠겼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아버지.
아버지가 온몸으로 지켜내는 방파제 안에서 가족에 헌신했던 어머니.
조용한 할머니와 늘 시끄럽고 부산스러웠던 아이들.
부모 품 안에서 현실적인 아무 걱정 없이 반짝이는 모든 것을 동경하며 마냥 꿈만 꾸는 것이 자식의 권리인 양.
세상으로 뛰어나가면 당장 뭘 얻을 수 있는 듯이 자식들은 얼마나 호기스러웠던지.
그리고... 그 사이
우리는 얼마나 먼바다를 헤엄쳐 왔던가...
우리가 겪어야 했던 40년 세월의 격랑은 먼 일처럼 아득하게 사라지고.
젊고 열성적이었던 어머니와
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무조건 자신만만했던 스무 살 딸이 바로 엊그제 같다.
간식-
어머니에게 있어 간식과 식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한 번에 드시는 양이 적기 때문에 두어 시간 간격으로 음식을 권한다.
대부분 씹지 않는 음식들이다.
거실 소파에 파묻혀 얇은 초콜릿이나 가벼운 쿠키를 곁들여 진하게 내린 커피(드립 커피 선호, 에스프레소는 차선인 걸로)를 딸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날은 몸 상태가 괜찮다는 표시.
흐리고 으스스 한 날에는 잎차를 넣고 한참을 끓여낸 달달한 밀크티, 스팀 우유에 초콜릿 가루를 넣고 잘 저은 핫초코도 가끔 드시는 메뉴다.
차와 함께 티라미수, 토스트, 크림빵, 치즈, 크루아상, 카스텔라 같은 당신이 좋아하시는 간식들을 권해보는데 거절할 때도 많지만 때로는 조금 드시기도 한다.
늘 좋아하셨던, 한 컵은 너끈히 드시던 천연 재료로 만든 색색의 아이스크림과 셔벗도 요즘은 입가심으로 한 두 스푼만 뜨신다.
새콤, 달콤, 향긋하고 부드러운 과일은 대체로 잘 드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준비해둔다.
무화과와 블루베리, 골드키위는 대체로 거절 않는 스테디셀러.
토마토 껍질을 벗기고 얇게 저며 올리브유에 무르도록 볶아 차게 식힌 것을 한동안 잘 드셨다.
얇게 저민 사과를 계피와 설탕, 레몬즙으로 푹 익힌 사과조림도 잘 드셨는데 치아 문제로 사과를 갈아서 만들었다가 요새는 외면 중.
갈증이 나거나 속이 메스꺼울 때는 집에서 담근 청귤청이나 레몬청에 탄산수를 부어 드시기도 하고,
첨가물이 들어있지 않은 포도즙과 사과랑 당근을 갈아낸 주스는 잘 드신다.
가끔 허브티를 찾으실 때가 있고, 쌍화차와 대추 생강차, 오미자청, 매실청, 꿀물은 잘 드시는 편이다,
몸 상태만 괜찮으면 쌀 튀밥은 즐기는 간식.
미지근한 물에 타 꿀을 넣은 미숫가루, 팥앙금이 들어간 찐빵, 이북식 인절미의 콩고물(떡은 말고), 약과, 산자도 전에는 가끔 찾으셨던 간식거리다.
브리나 까망베르 같은 부드러운 치즈에 꿀 또는 볶은 지리멸을 빻은 가루를 뿌려 드시기도 하고, 촉촉한 생크림 케이크, 버터를 듬뿍 얹은 통밀빵도 한때는 선호했는데 요새는 다 싫다 하시네.
대신 요 며칠은 강판에 간 사과와 마른 새우, 지리멸 볶은 것과 황태채를 입에서 녹여 드신다.
딸은 종일 이것저것 지치지도 않고 먹을 것을 제시하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당신 의견을 분명히 밝히시기 때문에 쿨 한 모녀는 한 번 묻고 한 번 답하면 끝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틈틈이 드시는 모든 것을 따져도 기초대사량이나 겨우 맞출까, 딸은 영양분과 열량이 부실한 날은 애가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