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TV 생활

by 기차는 달려가고

한동안은 TV 드라마도 보셨지만 "왜 이렇게 시끄럽다니." 하시고는 그 세계를 떠나셨다.

TV를 즐기시지는 않아 낮에는 이것저것 만들거나 거실에서 딸과 이 자리, 저 자리를 각각 차지하고는.

책도 읽고.

차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었다.

하지만 글자도 아른아른 잘 안 보이는 밤이 되면 당신 혼자 앉아 있는 방에서 별달리 할 일이 없다.

TV를 켠다.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하셨다.

각 방송사에서 내보내는 재방송 또 케이블 채널들마다 재방송되는 지난 프로그램을 거의 외울 만큼 즐겨보셨다.

당신이 가본 곳, 가지 못한 곳.

우리 저기 갔었지.

혹은 너는 저기 가봤니?

나중에 꼭 가봐라, 참 멋지더라.

하시면서.


음식 관련 프로그램도 흥미롭게 보셨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어머니는 당신의 음식과 다른 한식.

다른 나라의 다른 재료와 다른 조리 방식에 큰 흥미를 갖고

늘 새로워하시면서 프로그램에 집중하셨다.

단, 여럿이 나와 시끌벅적 호들갑스러운 방송은 싫어하셨다.

아이구, 난리도 아니구나, 하시면서.


또 자연인 프로그램도 즐겨 보셨다.

내가 보기엔 다들 비슷하더구먼,

어머니는 각각의 자연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눈여겨보셨다.

에유, 나도 좀 젊었으면 시골에 가볼 텐데, 하셨지.



병상에 누웠을 때 어머니 곁을 지켜야 했던 딸은 어머니와 TV의 공동 시청자가 되었다.

리모컨을 다룰 줄도 모를 만큼 TV에 관심이 없었던 딸은,

어머니가 좋아하실 만한 프로그램을 찾아 리모컨을 수없이 눌러댔다.


어머니는 험난한 조건에서 아무 장비도 없이 혼자 살아 나오는 생존 프로그램을 아주 재미있어하셨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먼바다 섬에, 또는 깊은 산속에 혼자 남았을 때.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나무 조각, 줄기, 열매 같은 자연을 이용해 불을 피우고, 물을 찾고, 먹을 것을 구하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작업.

담담하게 살아내기 위한 실용적인 지식과 방법을 몰두해서 보시더군.

영어로 된 프로그램이었는데 어찌어찌 다 알아들으셨다.


의외였던 프로그램도 있었다.

낡은 자동차를 경매장에서 낙찰받아 싹 고쳐서 가치를 높이는 프로그램도 어머니는 재미있게 보셨다.

기계에 흥미가 없는 딸은 별 관심이 없는데 어머니는 보고 또 보면서 자동차를 어떻게 고치는지.

기능적인 것, 디자인적인 것 각각 달라지는 양상을 딸에게 일일이 설명해주셨다.


또 커다란 나무 위에 나무집을 짓는 프로그램도 꼭 찾아보셨다.

나무가 아무리 크다한들 저렇게 크고 무거운 구조물을,

드릴로 구멍을 뚫어 가며 지어 올리는 게 맞는지 선뜻 동의는 안 되었는데.

어머니는 매번 비슷한 듯 다르게 지어지는 나무집과 주변 풍경을 재미있어하시더라.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앤소니 보댕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세계 각지를 찾아가 그곳의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얘기하는 지극히 인문학적인 프로그램.

딸도 아주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어서 모녀는 나란히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보고 또 보았는데.

프로그램이 끝나면 어머니는 한결같이 에휴, 한숨을 쉬시며.

아까운 사람이다.

왜 그랬다니.

보댕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셨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해준 앤소니 보댕과 프로그램 제작진, 정말 고맙습니다.

제 감사의 마음이 전해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의 시간에 진지한 앤소니 보댕과 그의 프로그램은 잠시나마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고마운 친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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