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겠다- 동해

마음에 남은 풍경

by 기차는 달려가고

예전에 어머니와 울릉도 갈 때 동해항에서 배를 탔었다.

어머니 가끔 떠올리시길,

1.4 후퇴 때 얻어 탔던 목선은 포항으로 내려가다가 묵호항에서 한나절 쉬어갔단다.

그때 쌀을 사서 이장님 댁에선가 불과 솥을 빌려서 밥을 지으셨다지.


강릉 바닷가에서 행복한 산책을 마치고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채 일단 번화가로 나왔다.

식사를 기다리는데 기분이 좋아서인지

흠, 몸 상태가 괜찮네.

강릉은 이것으로 충분하고,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이르다.

확인해보니 조금 있다가 묵호 행 기차가 있구나.

저녁에는 동해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KTX가 있다니.

과로 한번 해보자.

좌석을 예매하고 서둘러 기차역으로 간다.



기차는 안인역을 지나 바닷가에 바싹 붙어 달린다.

아침 내 화창하던 하늘은 구름에 가려서

회색의 낮은 하늘에 출렁이는 잿빛 바다.


묵호역 관광안내소 직원은 친절하다.

직접 길로 나와서 항구로 가는 길을 세세하게 일러주면서,

관광지 인쇄물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고마워요^^


거리는 조용하다.

오래된 건물들, 가게들마다 어지럽게 간판은 붙어있는데 영업 중인 지는 모르겠다.

적막한 항구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항구에 바싹 붙어있는 가파른 언덕을 바라본다.

다닥다닥 매달린 작은 집들.

기차에서부터 안 좋아지기 시작한 몸 상태로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가는 데까지 가보지 뭐, 경사가 덜 해 보이는 쪽으로 느릿느릿 올라가 본다.


삐뚤삐뚤 골목은 아주 좁았고,

집들은 매우 작았다.

예쁘게 지은 새집도 있고 고치기도 해서 아기자기 동네는 예쁜데.

중간중간 무너진 집, 허물어지는 집이 있더군.

공사를 하러 온 듯 트럭과 일꾼들은 있었지만 주민들 자취는 느낄 수 없었다.

좁고 높은 계단을 오르다 바다를 향해 숨을 고른다.

이 집들이 식구들로 꽉 차 있을 때.

재잘재잘 아이들 소리가 끊이지 않았겠지.

아침이면 햇빛이 환하게 방을 밝히고.

항구로 들어오는 아버지 배에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내려 갔으리라.



동해시는 깊은 산과 망망한 바다 사이,

묵호에서 북평까지 좁고 긴 지역에 띄엄띄엄 있던 고을들을 모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나 보았다.

논담골을 내려와 인적이 없는 정갈한 시장을 둘러보고.

막 다가오는 버스를 탄다.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다리가 몹시 아팠고 정신이 가물가물 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마땅한 곳이 안 보였다.


버스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빙빙 긴 거리를 이동한다.

묵호 쪽은 거리가 꽤 오래되어 보였고 지나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시청 부근에 오니까 새로 지은 듯 아파트 단지들이 있고 갑자기 번화해진다.

앞자리 할머니는 차창으로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분과 큰소리로 인사를 나누시네.

북평장에 가는 길이야, 하신다.

내가 버스를 내릴 곳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북평 오일장.

꽤 큰 장이라더니 그럴 만하다.

큰길에서 뒷길까지 길고 넓게, 여러 블록에 걸쳐 장이 형성되어 있다.

타지 사람들 보라는 오일장이 아니고 지역 분들 위주의 생활친화형 시장이라는 걸 알겠더라.

생선, 건어물, 고기에서.

저장 식품, 과일, 채소와 밤, 고구마.

칼과 낫 같은 날붙이들에 꽃과 채소 모종들.

닭강정과 찹쌀도넛, 옷과 신발들.

주민들을 위한 온갖 생활용품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뒷길에는 국밥집들이 주르르 있고.

건물들은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여기는 활발하게 사람들이 드나드는구나, 싶었다.

나는 뒷길에 있는 카페에서 피로한 몸을 쉰다.

길 건너에는 기울어가는 낡은 주택- 그러니까 길에서 곧장, 약간 튀어나온 현관으로 출입하는,

현관 양쪽에 대칭으로 창문이 달려있는 기와지붕의 단층 주택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아마 똑같은 모양이었을 건물은 새로 고쳐서 가게로 쓰고 있었다.

꽤 오래된 시장입니다만,

새것에 밀려나지 않고 여전히 현역입니다!



아직 물건이 산더미인 시장이 파할 때쯤.

나는 북평장을 떠나 동해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데까지 가보지, 뭐- 정신.

화물차들이 드나드는 길고 긴 벽돌담,

을씨년스러운 공장들과 항구 구역을 지나고.

꾸역꾸역, 비어있는 거리를 걸었다.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고 몸을 비틀거리며 역에 닿았고.

아담한 동해역에서 한참을 기다려 기차를 탔지.

자다 깨다 하면서 진부, 평창, 만종, 양평 같은 곳을 지났다.


내 평생 가장 많이 걸은 날.

20km 가까이 29,000 보가 넘는 걸음.

집에 와서는 혼절했는데.

걸핏하면 세수 않고 동네는 나다녔지만,

강원도 바다까지 세수 안 한 얼굴로 하루 종일 돌아다닐 줄이야.

따끔따끔한 얼굴에는 뾰루지가 돋았고.

그래서 홍삼을 먹으며 매일 밤 팩을 붙인다는 이야기.



강릉을 떠나면서부터 몸이 힘들어져서 휴대폰 누를 엄두도 못 냈네요.

그래서 사진 한 장 없음.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새벽 기차 타고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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