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Dec 01. 2019

감자야 고마워

음식에 관한 단상 2

어머니는 여덟 시간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고 꼬박 한 달을 병실에 계셨다.

수술은 잘 됐다는데 팔순이 넘은 고령이어서인지 다른 환자들에 비해 회복이 더뎠다.

회복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통 식사를 하려 들지 않아 자식들의 애를 태웠다.

처음 음식을 드시고 탈이 나더니 음식을 더 거부하셨는데,

병원 식사는 물론 집에서 해간 음식도 몸에서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체중은 죽죽 내려 앙상한 상태로 퇴원을 하게 됐는데...


온갖 산해진미를 차려도,

즐겨 드시던 반찬을 해봐도 반응이 영 시들, 시들.

에고, 밥상 차리는 딸은 걱정이 가득했다.

곧이어 항암치료도 받아야 하는데,

얼른 체력을 키워야 하는데.

마음은 조급하지, 바닥으로 내려앉은 식욕은 요지부동이지,

수술이 끝이 아니로구나.



때는 6월 하순.

주문한 햇감자가 배송됐다.

보슬보슬 감자를 삶아 식탁에 올려놓았더니,

엄마 시선이 식탁으로 돌아간다.

어라, 엄마 손이 감자한테 뻗어나가네!

오, 한 입 드시네!

드실 만 해?


격렬한 사투를 벌이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은,

화려하고 뽐내는 잘난 음식이 아니라

고요하면서 보드라운 감자에게 마음을 열었나 보았다.

삶은 감자가 불러낸 실오라기 같은 식욕은 감자볶음, 감자전, 감자구이, 감잣국을 거쳐.

콩국으로, 새우구이로, 도가니탕으로 확대되었고.

어머니는 체중이 늘면서 4주마다 3박 4일씩, 6차에 걸친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워낙 감자를 잘 먹었다.

고추장찌개에도 감자가 듬뿍 들어가고.

추운 겨울날 아침으로 뜨끈한 감잣국을 한 사발 먹고 현관문을 열면

추위야 덤비시든지? 기백이 넘쳤다.

간식으로 종종 준비해주셨던 감자부각.

아버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어머니에게 주문하셨다던 도톰한 감자튀김.

소고기랑 같이 조리는 감자조림.

함경도식 감자전.

감자채 볶음.

감자 사라다!

감자 크로켓.

감자밥,

매운 고등어조림에도 감자, 맑은 조기 소금 지짐에도 감자!

닭고기 오븐구이의 동반자, 감자.

감자탕에는 알감자,

삼겹살 구울 때는 얇게 저며서 함께.

감자의 담백하고 은은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은 어떤 재료들과도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낸다.


나서지 않고, 튀지도 않고, 별나지도 않고, 수더분한 듯,  무던한 듯.

그러나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감자는 비싸지도 않고(감자 재고가 줄어드는 봄에는 비싸진다!),  구하기도 쉽고.

사시사철 우리 밥상을 묵묵히 지켜준다.


고맙다, 감자.

네 덕에 잘 먹고 사는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그때와 지금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