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Dec 02. 2019

화채를 아시나요?

음식에 관한 단상 3

계절, 기후와 상관없이 1년 내내 각종 과일이 넘쳐나는 시대라

언제든 싱싱한 과일을 골라먹는다.

집에서도 손쉽게 여러 가지 과일 주스를 만들어 먹고,

가게에는 온갖 색깔과 향을 뽐내는 현란한 음료가 계절마다 등장한다.

그래서인가, 우리 어릴 적에 즐겨 먹었던 화채는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난 것 같다.

화채가 뭐에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으려나.



우리 어릴 적에 과일이 풍성한 여름은 시원한 화채의 계절이기도 했다.

제일  흔하게는 수박화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선분홍 수박을 썩둑썩뚝 잘라서.

커다란 쟁반에 수북이 담아 방에 들여 가면.

와르르 달라붙은 아이들은 금방 파란 껍데기만 남겼다.

손님이 오신다면 일부러 과일을 잘라 화채를 준비하기도 했지만.

어쩌다 과일이 많거나(금방 안 먹으면 곧 물러지기 때문에),

혹은 맛이 맹탕이라(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배부른 식구들의 외면을 받았을 때,

어머니는 과일로 화채를 만드셨다.

씨를 발라낸 수박 과육을 모양내어 잘라 설탕을 뿌리고,

사이다를 붓고.

과일이 맛없으면 주스 가루('탱'이라는 미국산 가루 주스가 있었다.)도 넣고.

딸기나 복숭아, 참외, 포도 같은 먹다 남은 과일 조각도 모양 있게 잘라서.

(드물지만 파인애플 통조림이 찬조 출연하기도 한다.)

냉장고에  넣는다.

시간이 지나 냉장고에서 과즙과 설탕과 탄산이 잘 어우러지고 시원해졌을 때.

어머니는 화채를 꺼내 유리 보시기에 덜고 얼음 조각을 동동 띄워주시면.

꼴딱꼴딱 조바심치던 아이들은 냉큼 받아 쭈욱 들이켰다.

하,

차갑고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달려가는 신체의  구조가 확연히  감지되면서,

입안은 얼얼하고 몸에는 소름이 돋는다.

우리들은 그릇 바닥에 남은

과즙이 빠져 맛이 없어진 과일을 어물어물 씹으며  금세 사라져 버린 달고 시원한 여운을 아쉬워했다.



겨울에는 보통 식혜나 수정과를 해 먹었다.

우리 어머니는 수정과를 자주 만들어 주셨다.

(식혜는 우리 집에서 인기 있는 품목은 아니었다.)

생강과 계피에 설탕을 넣고 한 솥 끓여 장독대 항아리에 넣어두면 추운 날씨에 살얼음이 어는데.

따듯한 방에 들어앉아 뻑뻑한 고구마,

쫀득한 가래떡으로 목이 메일 때.

곶감 조각을 넣고 수정과를 부어 꿀떡꿀떡 마신다.

곶감을 좋아하는 나는 물에 풀어지고 단맛이 빠진 곶감도 호로록 삼켰다.



나 어릴 때 한동안 아마 재종 고모(정확히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다... 아버지 육촌 누님이시긴 한데) 되시는 분이 건너 동네에 사셨다.

일제강점기 때 그 댁은 만주 봉천에서 살다 왔다는데.

형제들만 주르르 있는 지방 도시 우리 아버지 어린 시절,

봉천이라는 먼 곳에서 온 당숙네의 네 자매들은 이국적인 문화 충격이었는지.

원피스를 입고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묶은,

하얀 얼굴의 예쁜 누나들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몇 번인가 그 댁에 혼자 놀러 다녔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반겨주고 재종 고모는 먹으라며 이것저것 꺼내 주시는데.

겨울에 놀러 가면 추운 마루 끝에 두었던 들통에서

살얼음이 낀 과일 화채를 퍼담아 주셨다.

여름의 화채와 다른 점은 물에 사과, 배, 귤을 잘라 넣고 설탕을 듬뿍 뿌려 푹 끓여서(분명히 생강이나 계피 같은 향신 재료가 들어갔을 것이다.) 차갑게 얼려 먹는다는 점.

새콤달콤+ 뒷덜미가 당길 만큼 쨍~다!


서울에서 의전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었던 재종 고모는,

어린 나와 따끈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앉아서 이가 시리게 차가운 겨울 화채를 먹으며.

아득한 표정으로 당신 학교 다닐 때 얘기도 해주시고

유명한 사람이 된 동창들의 학창 시절 얘기도 들려주셨다.


또래 친구들이 조잘조잘 어울려 놀기도 바쁜 나이.

친구도 많고,

결단코! 재잘재잘에서 뒤지지 않던 그 어린이는,

왜인지 나이 든 친척집에 혼자 놀러 가서 천연덕스럽게 밥상을 받고 옛날 얘기를 듣던.

,

좀 별나셨..


매거진의 이전글 감자야 고마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