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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Sep 16. 2019

그때와 지금 1

음식에 관한 단상 1

"참 달구나"

강판에 갈아드린 참외를 조금씩 떠 드시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곁에서 참외씨까지 홀랑 홀랑 참외 조각을 삼키던 나는

"맨날 먹으면서도 깜짝깜짝 놀랜다니까. 요새 과일은 옛날에 먹던 거랑 이름만 같아.

크기도 커지고, 종류도 많고, 죄다 달아."

그렇게 모녀는 여름날 오후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을 살아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논평을 나누었다.


요새 과일들은 다 달다.

달기만 한가?

예전 것에 비해 크기는 정말 커졌고,

품종이 다양하고,

모양도 이뻐지고,

빛깔은 선명하다.

온실 재배로 제철이 따로 없어,

예전에는 초여름에나 먹던 딸기를 추운 겨울부터 먹는다.

요즘 애들은 딸기 철, 봄날의 딸기밭을 알까?

나 어릴 적 '나이롱 참외', '개구리참외'는 다 어디로 갔지?


그때는 과일이라고 다 맛있는 게 아니었다.

자칫하면 무를 씹는지-가을  무보다 맛없는 과일이 많았음,

맛이 들지 않은 과일을 고르기 쉬워 뭘 하나 고를 때도 신중하게, 오감을 다 동원했었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수박을 손수레에 밀고 다니며 동네 어귀에서 소리쳐 고객을 부르던 수박 장수들은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눈으로 고르고, 손으로 통통 두드리고,

귀로  소리를 듣고,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아서는.

그래서 고르고 고른 수박을 한 귀퉁이 삼각뿔로 잘라 색깔까지 확인하고서야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룰루 기분 좋아 비닐끈 주머니에 넣은 수박을 흔들흔들하며 집으로 갔는데.

이미 옆동네로 장소를 옮겨 수박을 팔고 있는 수박 장수에게 반쯤 먹은 수박 쪼가리를 들고 와서는,

속여 팔았다며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는 고객이 있었다.

먹고살기 어려워서 조그만 손해에도 과민한 사람들은,

서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고, 멱살을 잡고, 그러다 밀치고.

한바탕 사생결단을 하면서!

고무줄놀이하는 여자 아이들이나 재잘거릴 뿐인 조용한 동네 작은 소요를 일으켰다.


요즘은 수박을 대충 골라도 맛있더라.

그때는 수박 한 통 사면 앉은자리에서 다 먹어치웠다.

먹는 입도 많았고 크기도 지금 것처럼 크지가 않았다.

지금은 식구는 적은데 수박 크기가 너무 커져서 한 번에 못 먹는다.

끙끙 무거운 수박을 싱크대 위로 들어 올려 조각조각 잘라 밀폐용기에 넣는 게 일이라,

이제 수박은 큰 맘먹고 사게 된.


아, 바나나.

그때는 왜 그렇게 비싸야만 했는지.

이민이나 유학으로 미국에 간 사람들은 한국과 달리 너무 싼 미국 바나나에 배신감을 느끼고는,

한동안 질리도록 바나나만 먹었습니다,

는 편지를 고국의 가족들에게 써 보냈었다.


예전에는 과일의 보관, 포장, 물류, 판매 기술이 지금 같지 않았다.

명절에 과일 선물이 많았는데,

사과는 나무 널판으로 짠 상자에 쌀겨를 넣어,

배는 볏짚을 넣어 담았다.

위에 조르르 놓인 과일을 다 먹으면 엉금엉금 쌀겨를 휘저어  하나씩 남은 사과를 찾는데,

그러다 상한 사과가 물컹 손에 닿으면,

보이지는 않은 채 촉감으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엄마야, 소리를 질렀다.



맛있어진 건 과일만이 아니다. 

채소도 종류가 풍부해졌고 크기도 커졌다.

예전에는 시장에도 삐삐 마른 가지, 뒤틀린 호박도

떳떳하게 한 자리 차지했었는데,

지금은 하나같이 고른 크기에 반듯하고 윤기 나는 쭉쭉 뻗은 채소들만 줄지어 있다.

모양 빠진 채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고기도 맛있어졌다.

우리 집은 육식이 기본이라 거의 모든 음식에 고기가 들어갔는데,

지금 고기가 훨씬 부드럽고 냄새도 안 나고 감칠맛이 난다.

20년 전쯤.

촌의 작은 식당에서 백반을 먹다가 김치찌개에 들어있는 돼지고기의 두꺼운 껍질, 그 위에 까만 털을 보고 아, 그랬었지,

잊고 있던 옛날 기억이 떠오르더라.


해산물도 마찬가지.

그때는 냉장, 냉동 기술, 배송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서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생선, 어패류가 많았다.

지금은 산지에서 깔끔하게 손질해서 가시 없는 살만 냉동해서 곧장 소비자에게 배송되니,

격세지감.



다 맛있어졌지만, 내 입맛에는 떡은 그렇지 않다.

달기만 하고 색깔은 요란하고 식감은 말랑하고  너무 부드럽다.

예전의 다소 투박하고 촘촘하고 담백한 떡이 그립다.

직접 떡메에 친,

미쳐 다 으깨지지 않은 쌀알이 씹히는 차지고 따듯한 인절미를 덥석 베어서,

콩을 삶아 설탕 가루를 솔솔 뿌려 만든 고물에 굴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었는지.

방앗간에서 방금 뽑아온 절편을 조청에 찍어 먹는 맛은 또 어떻고!

잔칫날 큼직하게 상에 오르던 술떡('증편'보다는 '술떡'이라는 이름이 딱 와 닿던)은 정말 술 냄새가 짙어서 어린아이들은 술떡 한 조각에 뒤집어질 듯 깔깔 웃으면서 비틀비틀 술 취한 흉내를 내며 잔칫집을 뛰어다녔다.

추석을 앞두고 모여 앉아 송편을 빚고.

설 전에는 함지박에 불린 쌀을 머리에 이고 방앗간 가서 가래떡을 뽑았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가래떡 맛을 요즘 누가 알까?

콩과 건포도를 따로 들고 가 맞췄던 백설기는 우리들 간식이었고.

찹쌀가루에 팥고물을 켜켜이 넣고 쪄낸 팥시루떡은 고사상의 중요 메뉴여서

개업하는 가게에서, 잔칫집에서, 제삿날 손님들에게 싸주는 떡이었다.

깨물면 푹 바람이 빠지던 바람떡.

설탕물이 주르르 흐르던 꿀떡.

색깔로 한몫하던 무지개떡.

80년대에 들어서는 우리 집에 두텁떡, 주악이 등장했다.

두텁떡은 팔던데 주악은 아직 하는 데가 있을까?


언제 한가해지는 날이 온다면 집에서 옛날 떡을 만들고 싶다.

푸짐하게 쪄서 사람들 불러 나눠먹고 말이지.


그런데, 그게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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