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캉스가 유행이라지?
음, 우리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자체적으로 호캉스를 했다.
그러니까 1960년 대 후반에서 1970년 대 중반쯤까지.
아버지가 늘 일로 바쁘시기 때문에 매번 시간이 많이 드는 바다까지 갈 수는 없어서.
바다로 놀러 가지 못할 때,
우리는 서울 근교 산속의 호텔로 피서를 갔었다.
지극히 단순한 이유.
그때는 산속이었던 평창동의 '만하장'이라는 돌로 지은 산장-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이름도 바뀌었다.
나중에는 꽤 큰 호텔이 되었다.-과
수영장의 높은 슬라이더가 유명했던 우이동의 '그린파크호텔'.
이 두 곳을 번갈아 갔다.
아이들은 낮에 수영장에서 진을 빼고 놀다가 다니러 온 병원 식구들, 친척들이랑 밥 먹고 낮잠도 한숨 자고.
밤에는 아버지 친구분들 사이에 껴서 호텔 바에도 따라갔다.
그러면 긴 머리에 가슴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마담은 우리에게 주스를 주면서.
새빨간 입술로 "오우 따님들이 참 예쁘세요."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지. ㅋ
그린파크호텔이 있던 우이동은 참 멀었다.
포장이 안 되어 울퉁불퉁한 도로가 있었는데,
더구나 장마 지난 다음이라 우이동 산길은 움푹 움푹 패어있어서 차는 요동을 쳤다.
한 번은 어머니랑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분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길.
"가다 보면 차가 펄쩍 뛰면서 오줌이 찔끔 나오는 데가 있거든. 그런 데를 오줌 고개라고 해."라고.
오줌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깔 웃어대던 아이들은,
"자자, 준비하세요, 이제 3번 오줌 고개 넘어갑니다."
번번이 예고해주시는 아저씨의 익살스러운 멘트로 우리는 데굴데굴 굴렀다.
늘 멀미한다고 징징대던 길이었는데, 재미있는 길이 되었다.
어머니는 뒷날 여러 번 그 기사님 일화를 떠올리셨다.
짐은 많지, 우는 놈, 비트는 놈, 배배 꼬는 놈들 데리고 멀리 있는 우이동까지 택시 타고 가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그 날 유쾌한 기사님 덕분에 우이동까지 지루한 길을 오히려 웃으면서 갈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셨다.
아버지 시간이 될 때는 바다로 놀러 갔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주중에 먼저 도착해서 놀고 있으면 주말에 아버지가 오시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대천해수욕장으로 여러 번 갔는데,
그때 대천해수욕장은 바가지요금에 오염된 바닷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대천해수욕장을 고집했던 이유는,
아버지가 다녀갈 수 있는 거리의 한계였고.
시설이 안정적이었으며.
아버지 성장기에 유명했던 대천해수욕장의 추억 때문이리라.
지금은 대천까지 두어 시간이면 가지만 그때는 기차 타고 한나절은 걸렸던 것 같다.
기차를 타고 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고 나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잠깐.
아이들은 곧 몸을 비틀면서 지루해했다.
"아직 멀었어? 얼마나 더 가야 해?"
반복, 또 반복.
그러는 중에 뒷좌석에 앉은 청년 네 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장발족이 아닌가!
어른들 신문에서 봤지.
경찰들이 길가는 그 '장발족' 들을 붙잡아 머리카락을 듬성듬성 잘라버린다는 걸.
흠, 불량학생이군.
나는 잔뜩 경계하고 있는데 아, 동생은 좋다고 생글생글 난리가 났다.
이런.
그런데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오빠야들이 너무 재미있어...
서울공대생들이라네.
내 친한 친구 아버지가 공대 교수 누구라니까,
과는 다른데 알고 있다나.
그래?
나도 새침 모드를 풀자마자 신나서 오빠들이랑 떠들썩하니 놀았다.
서로 퀴즈를 내고 맞추는 게임도 했는데,
내가 엉터리 퀴즈를 내고는 내 말이 맞다고 막 우겨댔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미안해요, 오빠들.
여태 부끄럽군요.
음, 기차 안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이랑 놀아주던 그 오빠들은,
얼마나 심심했던 것일까?
우리 어머니는 대천에 도착해서
착한 학생들 덕분에 애들 데리고 수월하게 왔다고 아버지께 보고하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