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눈에 담겼던 몇 가지

마음에 남긴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내가 어린이 시절에, 그러니까 1960년 대쯤에.

여자들은 혼자 외출하기를 꺼렸던지.

아가씨이던 고모도,

노인이었던 할머니들도 외출하려면 나를 찾았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우리 집 바깥의 풍경도 많이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외출이라면 잔칫집을 빼놓을 수 없다.

환갑잔치, 결혼식은 정말 큰 잔치였지.

지루한 결혼식이 끝나고 식당에 가서 먹던 잔치국수나 설렁탕에 편육, 잡채, 족편, 홍어무침, 전, 찐 닭, 불고기 같은 맛있는 피로연 음식들.


아, 우글우글 부산스럽던 결혼사진도 있다.

베이비붐 시절이어서 신랑 신부 가족사진을 찍을 때면 주르르 아이들이 앞줄을 채웠다.

앞에서 사진사가 하나, 둘, 셋.

팍, 눈부신 조명을 터트리면.

몸을 비틀며 밥은 언제 먹어? 만 반복하던 아이들은,

앗! 깜짝이야, 두 눈을 감았다.



우이동 계곡에는 요릿집들이 있었다.

넓은 부지에는 본관과 별채들이 띄엄띄엄 놓였었는데 거기서 환갑잔치가 열렸다.

잔치음식이야 결혼식 피로연 식단이나 그리 다를 게 없었지만,

방바닥에 느긋하게 앉아서 한나절 실컷 잔치를 즐긴다는 차이가 있었다.


진즉에 동화책 두어 권 옆에 끼고 간 나는 할머니 곁에 앉아서,

할머니가 발라주는 닭고기에, 전에, 국수에, 수육으로 배 터지게 드시고는.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와 절편, 약과 한 접시 수북하게 들고 방구석에 자리 잡는다.

동화책을 펼치고 간식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데.

가끔 고개를 들어 잔칫상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주전자를 엎어 야단맞는 아이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했지.

흥!



잔치라면 집들이도 빼먹을 수 없다.

지금도 집 문제는 인생의 중차대한 과업이지만,

그때는 생존과 직결된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던 게 틀림없다.

오죽하면 사람들 불러서 그간의 눈물, 콧물 사연을 늘어놓으며 잔치까지 했을까.


개봉동인가 오류동인가 확실하지는 않은데,

어렸던 내가 그 먼 동네까지 외할머니 따라갔던 집들이를 기억한다.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가까운 이들을 불러 작은 잔치를 열었던 것 같은데.

새로 주택 단지를 조성한 동네였는지,

마당은 있는데 담장도, 대문도 없이 달랑 집들만 있었다.

또 집도 아직 미완성이어서 도배도 안 된, 문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시멘트 냄새가 나는 작은 건물이었다.

그래도 집주인은 기분이 좋아서 연신 술을 따르며 자랑이 늘어졌지.

문도 안 달린 마루에 TV는 있어서 저녁이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슬금슬금 들어와 다 함께 TV를 보았다.



비교적 안정된 화이트 컬러들이 살던 우리 동네에 익숙해 있던 나는,

처음 보는 생소한 풍경에 좀 놀랐고.

언제 이 집이 다 지어지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떠들썩 기분 좋은 어른들은 자기들 얘기에 푹 빠져 있어서.

무심한 어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나는 역시 구석에 조용히 앉아 동화책만 붙들고 있었다.



*** 덧붙여서


그러고 보니 그 시절은 한국전쟁 끝나고 겨우 십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우리 외할머니 지인들이 모두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낯선 '이남'으로, 빈손으로, 혼자 또는 가족 일부만...

잠깐 폭격만 피하려고 내려온 피난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십여 년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남한에서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환갑잔치를 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집을 장만하고.


생각해보니 엄청난 인생 여정의 순간을 어린 내가 보았던 거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참새구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