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외출을 더 못하니까 한가해서 그런지,
문득 옛날의 한 순간, 순간들이 불쑥불쑥 의식 위로 떠오른다.
전도 후도 없이 딱 한 장면.
남은 모르겠지만 나는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들.
달고나가 유행이다.
내 어릴 적 달고나는 하얀 네모 덩어리였다.
그걸 불 위에 얹은 국자에서 액체로 녹이고 (아마 소다를 넣어서) 그걸 식혀서 먹었다.
지금처럼 설탕을 녹여서 소다를 넣어 부풀려 식힌 것은 뽑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우리 부모님은 위생 문제 때문에 길거리보다 집에서 해 먹게 하셨다.
소다는 중조라는 가루를 아버지 병원에서 갔다 썼다.
(아마 같은 성분인 걸로)
아이들이 뛰노는 골목 어귀에 연탄을 두 군데 피워놓고 뽑기 장사를 하던 아저씨가 있었다.
쪼그리고 앉은 아이들에게 설탕 한 숟가락 푹 퍼담은 국자나 또는 달고나를 건네고.
어린이 손님이 없을 때는 고객에게 팔 물건을 준비한다.
설탕을 노랗게 녹여서 치르르르, 철판에 주르르 흘려 총이나 칼 또는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거나.
뽑기를 틀에 눌러 여러 가지 모양을 새겼다.
부러뜨리지 않고 새겨진 모양을 그대로 뜯어 내면 하나 더 주는 게임.
먼지가 뽀얗게 일던 골목 구석에서 연탄불 앞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들의 풍경이 떠오른다.
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손수레 목마를 태워주는 행상도 있었다.
손수레 위에서 빙빙 돌아가는 말머리 모양의 의자 몇 개 올려서.
동전 한두 개 받았을까?
이 골목 저 골목 옮겨 다니며 동요를 틀어 꼬맹이들을 불러 모았다.
망개떡 행상도 있었다.
유리로 만든 문이 달린 선반 안에 이파리에 싼 망개떡을 담아서.
선반 두 개를 장대 양끝에 걸어 어깨에 메고 다녔다.
나는 쌉쌀한 이파리의 향에 싸인 보드라운 망개떡을 좋아했다.
이런 행상들로 생활이 됐을까?, 는
어른이 된 이제야 드는 생각이고.
그 시절에는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주셨던 반가운 분들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다.
철공소도 있었지.
당시 유행하던 철제 대문이나 유리창문에 덮는 방범망, 담장 위에 두르는 뾰족한 철제 방범장치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가게가 좁으니 길에서 작업을 많이 했는데.
쒹쒹, 철제 파이프를 자르거나 불꽃이 팍팍 튀는 용접 같은 거.
나는 무서워서 자동차가 뜸한 찻길로 내려서 철공소 앞을 지나갔지만,
그래도 파란 불꽃이 튀어 오르는 아찔한 용접 장면을 곁눈질로 보았다.
큰길과 골목이 만나는 어디쯤.
먹을거리를 파는 손수레들이 낮과 밤으로 업종을 바꾸어 전을 열었다.
자전거를 끌고 나온 번데기 장수는 신문지를 말아 만든 원뿔형 봉지에 번데기를 넣어주었고.
울퉁불퉁 붉은 멍게, 징그러운 해삼 같은 것을 펼쳐서 파는 손수레도 있었다.
양푼을 이고 나온 다슬기 장수 앞에는 옷핀으로 속을 뽑아먹는 손님들이 주저앉아 있었지.
통금이 있고,
야경의 딱따기 소리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새벽송이라는 게 있었다.
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마치고 한밤중에 성가대가 신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찬송가를 불러주는 활동이었다.
새벽에 노래가 끝나고 성가대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두신 식사를 했다.
자가용도 오리털 롱코트도 없던 그 시절, 그 추운 날에.
충무로에 있는 교회에서 꽤 멀리 있던 우리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오십 년도 더 지난 이제 와서 궁금하구나.
동네 뒤에는 개천이 흘렀다.
여름날 아이들이 물장구치던 개천에는,
겨울 추위로 얼음이 단단하게 얼면 스케이트 장이 열렸다.
한쪽에서는 장작불을 때서 손을 녹이고.
다른 쪽에서는 어묵 같은 먹을 것을 파는 가판대도 있었다.
아버지가 사 오신 롱 스케이트를 타고 나도 그 대열에 꼈었으나...
그 개천가에 루핑을 씌운 판잣집들이 생겨났다.
개천 건너 푸른 산에도 판잣집들이 지어졌다.
나무들이 사라지고 집들로 덮여가는 광경을 보았다.
지금 그 산은 고층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격세지감.
거의 반 세기가 흘렀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