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에 얽힌 사연

마음에 남긴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우리 외할아버지는 해방 다음 해 어느 날, 집에서 출근하신 뒤 사라지셨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 어두운 밤,

포승줄에 묶여 몸이 천으로 뒤집어 씌워진 세 사람이 차에서 내려져 소련행 선박으로 실려갔다고 하고.

그중 한 사람이 특이했던 우리 외할아버지의 걸음걸이였다는 항구 노동자들의 증언으로,

아마 소련 어딘가로 끌려가셨나, 짐작했을 뿐이다.


몇 년이 지나 소련의 어느 꼴호즈에 갔던 북한 사람은,

자신이 북한에서 방문했다는 걸 알게 되자

달려가는 차에 탄 누가 소리치기를,

"내가 흥남 사람 아무개요, 가족에게 나 살아있다고 전해주오."

했다는 풍문이 우리 외할머니 귀에 들어왔다.

말의 출처를 수소문하던 중 전쟁이 심해져서 외가는 남쪽으로 피난 나오게 되었고.

이후 외할아버지에 관해 더는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첫 추석을 말씀하시길.

지인들과 왕래도 끊고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내보내 세 식구만 남았는데, 날씨가 유난히 추웠다고.

전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제수를 이고 지고 갔던 성묘길에,

깡충깡충 살짜리 장남을 앞세우고,

내복을 겹쳐 입은 모녀가 제물이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선산을 올랐다고 하셨다.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묘지와 기념관이 있다.

그 제일 높은 곳, 한 귀퉁이에는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라는 생뚱한 탑이 세워져 있다.

높은 탑 양 옆에는 비분강개한 어조의 격문과 빼곡하게 이름이 적힌 비석들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 비문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하도 반공을 팔아먹어서

음, 이 탑을 세운 정권의 의도를 신뢰하기가 좀 그렇지?


그럼에도 내가 오십 년 만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우리 외할아버지 성함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십 년 전 나는 탑의 제막식에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따라왔었고.

땡볕에서 너무나 지루한 연설들을 참아내야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식이 끝난 뒤 어머니는 비석에 새겨진 어느 이름을 가리키며 외할아버지 성함이 여기 있구나, 하셨지.



오십 년 만에 내가 그곳에 들어서면서 비석에 눈길을 돌렸을 때,

마치 내 시선을 빨아들이듯 단번에 할아버지의 성함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덜컹거리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적어도 이백 명은 되어 보이는 수많은 이름 중에서 말이다.


정확한 사건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학살을 당했고.

그 몇 배가 되는 살아남은 가족들은 평생 고통을 마음에 품고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우리 외할머니가 속해있던 '유족회'에는 이삼십 대에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어렵게 살아갔다.



아침의 효창공원은 평온했다.

산책로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벤치에는 하얀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가을을 흠뻑 즐기고 있었다.


억척스럽게 살아갔던 부인들을 떠올렸다.

다들 돌아가셨겠지.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시기를.


비문에 적힌 이름으로 볼 때 객관적으로는 우리 외할아버지가 연루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우리 외할아버지가 어디선가 꼭 살아계셨기를 바란다.

가족 잃은 고통이 가슴 한가운데에 콕 박혔겠지만,

억울한 죽음 대신 한때의 고초만 겪고.

그래도 행복한 일상을 사시다가 편안하게 삶을 마치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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