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헴 엣헴, 왕이 되어 볼까?

내가 좋아하는 곳

by 기차는 달려가고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북촌에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이쪽에도 궁궐, 저쪽에도 궁궐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문화재에 관한 인식도, 행정력도 지금 같지 않아서,

요새 놀이공원 가듯 궁궐로 소풍도 가고, 백일장이나 사생대회(아실까요?)도 치렀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아침, 궁을 찾았다.

쌀쌀한 공기에 잎을 떨군 굵은 나무들.

붉은 기둥과 검은 지붕,

돌 길과 흙바닥.

텅 빈 공간.

정갈함.

내가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다.



조선 시대 문화의 기초를 닦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심미안이 꽤 괜찮았다, 는 소감이다.

궁궐들은 으리으리하지 않고,

실용적이면서 담백하다.

뜰은 소박하고 방은 아늑하다.

임금이 행차하는 큰길도 있지만

오솔길, 작은 길이 궁궐의 곳곳을 이어준다.

애써 치장하지 않고 위세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은근함과 수수함의 멋과 기품을 풍긴다.


단지 소유한 물질의 양이 다른 나라 왕실보다 적어서가 아니다.

세계관이 건실했다는 느낌이 든다.



옛날, 왕이 거처했던 시절.

아니되옵니다, 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가 반복되는 궁궐에서,

권력을 향한 탐욕으로 거짓과 모략을 불사하는 사악함 속에서.

단지 혈통 때문에 왕관을 견디어야 했던 그들은,

정신과 마음의 온전함을 지켜내기가 어려웠겠다.

하루 종일 과한 무게에 시달리다

비로소 혼자가 된 밤.

왕에게도, 왕비에게도, 세자에게도.

궁궐은 적막하고 쓸쓸했을 것 같다.

둥근 보름달이라도 떠서 검은 나뭇가지 사이에 걸리면.

때마침 새라도 포르르 어둠 속으로 날아가면.

뜰을 이리저리 거닐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운명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지 않았을까?



내가 궁궐에서 꼭 태어나야만 했더라면(무슨 이런^^) 공주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겠다.

천방지축 궁궐의 곳곳을 뛰어다니고.

색색의 비단옷을 갈아입다가.


볕 좋은 오후.

좋아하는 간식을 듬뿍 담은 바구니를 든 나인을 뒤따르게 하여.

나무 그늘에서 수정과에 바삭바삭 산자를 먹고.

연못가에 앉아 배숙에 밤 조림을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고는.

신나게 옷고름 휘날리며 그네까지 한 판 뛰었겠지.


부슬부슬 비라도 내려서 잠 못 이루는 공주는,

괜히 마음이 서러워져서는 어느 집으로 시집 갈지,

궁을 떠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이런저런 상상으로 심란해졌겠다.



내가 그 시절 궁궐의 공주였다면.

초가을 바람 솔솔 부는 툇마루에 턱을 괴고 앉아

뜰을 비추는 달빛에 한껏 감상적이 되어서.

이별가라도 한 수 읊어 눈이 촉촉이 슬픔에 젖다가는.

...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윗방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는 나인을 발로 뻥뻥 차면서는.

야, 나 배고파.

얼른 소주방에 가서 맛난 것 좀 들고 와, 했겠지.

못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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