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마치고 수세미를 빨고 개수대의 물기까지 말끔하게 닦는다.
바닥을 닦고 발받침을 반듯하게 접어 놓는다.
앞치마를 벗어 건다.
부엌을 둘러본다.
냉장고 안에는 김치, 고추장, 된장, 멸치에 며칠 먹을 채소와 고기, 생선이 들어 있고,
당장 내일 먹을 국이랑 반찬도 얌전히 통에 담겼다.
펄펄 끓은 보리차 한 주전자는 보온병에 넣었고.
깨끗이 닦인 물기 없는 그릇은 차곡차곡 제자리에 놓였다.
싱크대와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늘어놓지 않았다.
네, 오늘 하루도 마무리 잘하셨습니다.
이제 방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시지요.
대단하지 않은 보통의 어느 날.
아니 그 어떤 흉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루하고 따분했지만 무사해서 감사한 날.
건강 상태는 나쁘지 않았고, 기분도 괜찮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 피로가 크지도 않았다.
평온한 심리 상태와 적당한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밥을 짓고,
반찬 서너 가지.
국은 넉넉히 끓이고 며칠째 생각만 했던 약고추장도 볶았다.
반찬은 각각 작은 접시에 덜고,
밥과 국을 뜨고 수저받침까지 갖춰서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렸다.
고맙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짧은 기도.
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보냈구나.
애썼다.
기다리는 축제는 보이지 않고
그럭저럭 끌어가는 답답한 나날.
살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는 문제들은 수시로 나를 흔들어댄다.
쉽게 동요하지 않도록.
스스로 보듬고 격려하고 응원해야지.
튼실하게 일상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단단한 생활의 틀이 나의 마음을 지켜주는 최후의 방파제가 되기도 한다.
친구들을 불렀다.
밖에서 맛집을 찾고 카페에 가는 것도 좋지만
이젠 편하게 한 곳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후식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게 더 좋다.
시간도 대충 점심때 와!
하면 알아서 각자 사정에 따라 모여든다.
일찍 온 친구들은 부엌에서 남은 일을 거들고
함께 밥상을 차린다.
늦으면 또 어때?
음식 남겼다 데워주지 뭐.
그런 융통성, 편안함, 허물없는 느슨한 관계가 좋다.
그렇게 부엌은 우리의 친숙함을 표현한다.
부엌이 있어 좋구나,
아마 지위와 부유함으로 생활의 때는 묻히지 않는 천상의 삶을 기대했을 아가씨들은,
그랬던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건강과 튼튼한 일상을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 부엌에서 누린 친밀함을 오래도록 지닐 수 있기를.
아파트건 주택이건
대체로 부엌은 북쪽에 자리 잡는다.
햇빛은 들지 않고 창문도 조그맣다.
또 식당은 부엌과 거실 중간에 있어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자리이다.
창문이 크고 볕이 잘 드는 부엌과 식당을 갖고 싶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음식을 하고
쏟아지는 빛 가운데서 음식을 나눠먹고 싶다.
각자 나눌 수 없는 버거운 무게를 지고 걸어가는 쓸쓸한 인생길에서,
함께 음식을 하고 나누는 소중한 시간.
부엌은 우리에게 잠시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바위가 되어 준다.
아마 빛이 쏟아지는 부엌을 갖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오랫동안 부엌에서 움직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