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넘버 원

-내가 좋아하는 곳

by 기차는 달려가고

초등학교 때 학교에 도서실이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도서실 관련 무슨 직함을 받았던 것 같다.

까마득한 옛날.

책 읽기를 좋아했으니 책이 모여있는 공간도 애정 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일요일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고 했다.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으나

우리 반 출석부 내 이름 옆에는 지각과 조퇴, 결석과 양호실 표시로 빼곡했다.

그러다 결심했다!

나도 친구들처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테야.

학교 근처에 '정독 도서관'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 7시쯤 갔나.

이미 열람실 대기자 줄이 담장 밖으로 늘어서 있었다.

도서관은 구경도 못하고 간식만 실컷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3 때 발동이 걸려 대학에는 붙었다.

(70년대에는 벼락치기로 대학 가는 게 가능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당시에는 드물던 개가식 서가였다.

볕 잘 들지, 천장 높지, 책 많지, 마음대로 서가에서 책 뽑아 읽을 수 있는 신식 도서관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냥 뿌듯만 했다.

바빴거든요.

집에서 뭉개는 시간이 제일 많기는 했지만 친구들이랑 카페도 다녀야지,

학교 합창단 활동(2학년부터는 학보사)도 해야지,

옷도 사러 돌아다녀야지.

부르는 데도 많고 갈 데는 더 많은 핵인싸.

수업을 오가며 도서관 건물 앞을 지날 때서야, 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마음은 부풀었지만.

곧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친구 얼굴을 보는 순간 도서관은 까맣게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 좋은 도서관도 서가의 책을 찾아 유영하는 학생들보다는

학교 시험 또는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복학생 선배랑 얘기했다.

세대가 다른 어른처럼 보였던 그 선배님은 내게 부모 덕만 보려 하지 말고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생각을 하라고.

적은 돈이라도 일해서 돈을 버는 경험이 중요하다, 고 충고하셨다.

아, 맞아. 좋은 말씀.

의욕이 불끈 솟아올랐다.


때마침 도서관에 아르바이트 공고가 붙었다.

대충 지원서를 적어 냈는데 오란다.

응, 정말?

일은 쉬웠다.(지루했다)

도서 카드 정리 같은 일을 했던 것 같다.(80년 대 초는 아직 전산화가 됐던 시기가 아니에요.)


어느 날 따분해, 따분해, 속으로 하품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카드 정리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앙칼지게 소리 높여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응? 책만 만지는 고상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싸울 때는 무지 살벌하더라.

나는 놀래서 고개를 돌릴 엄두도 못 내고 길지는 않았을 그 시간, 벼락 맞은 듯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다른 일도 있었다.

우리 학교 여학생 화장실은 휴게실을 겸해서 요즘 백화점 화장실처럼 입구에 소파가 놓여 있었다.

몇 안 되는 여학생들은 전공 불문, 만나면 소파에 주저앉아 수다도 떨고 그랬는데.


내가 손을 씻고 있는데 소파에 모여들 말하길,

잘 사는 애들이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차지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니?- 뭐 그런 얘기.

우리 집이 잘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좀 사는 집 딸로 알려져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학생 때 남들 배경에 참 민감한 것 같다.

사회화 초기라 탐색하는 기간이라 그런지.

사회인이 되면 계속 그런 사람과 자기 인생에 열중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난 원래 밥 먹으려다가도 누가 젓가락 들고 덤비면 그냥 내 밥을 밀어주고 마는 사람이었다.

(다투는 거 싫어요.)


그렇게 도서관 아르바이트는 한 달도 못 채우고 끝났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참고 도서 대출 때만 도서관에 갔을 걸.

오히려 졸업한 뒤에 동문들이 회비 내고 도서관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한동안 도서관에서 책 대출도 하고 도서관이라는 신선 같은 공간을 즐겼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도서관도, 책도, 도서관 운영도 모두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서유럽, 북미 대륙,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동네마다 있는 도서관들이 참 부러웠었다.

아이들이 동네 도서관을 친구 집처럼 드나들고,

백발노인들이 돋보기 끼고 책에 몰두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언제 이렇게 될까, 싶었는데...



됐다!

지난 20년.

나는 도서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고.

도서관 주최 각종 문화 강좌도 참석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도 보면서 공공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진심 즐겼다.

마당의 나무는 얼마나 좋게?

꽃들은 또 얼마나 예쁜지.

괜히 도시락 싸가서 도서관 식당에서 먹고.(도서관 식당은 왜 그리 추울까? 일 년에 열 달은 춥다.)

도서관 건물들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커뮤니티에는 때마다 도서관 이용자들에 대한 불만의 글이 올라온다.

대체로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이용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보다.

우리 세대는 도서관 이용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세대이다.

기껏해야 시험공부하러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서 자리 차지한 기억만 있겠지.

타인과의 공존보다는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전투태세로 생계 활동을 이어오다가

이제 사회 뒤편으로 밀려나서 돈 적게 들이고 시간 죽일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발견했겠다.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부예요, 일부)


누가 날 건드리기만 해 봐라,

안 그래도 울화로 가득 차서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포스로 목청을 높이고 막무가내이시다.



도서관 이용자들이 올바른 도서관 이용법을 실천하여 무법자들의 기세를 꺾는 것 외에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일일이 언성 높여 싸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물론 도서관 측이 이용자들이 규정을 지키도록 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상식적인 이용자들이 상식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습이 압도적이 되면,

힘에 민감한 무법자들은 위축될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난 수십 년,

우리 사회는 그렇게 조금씩 좋아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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