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의 침실

by 기차는 달려가고

프랑스에 갔었다.

1980년대 중반,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개발도상국 한국.

땡전 뉴스의 군사 정권.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선진국 서유럽은 우리가 배우고 따라가야 할 지향점으로 여겨졌던 때였다.

경복궁 부근에 있던 프랑스 문화원에 한창 시절의 프랑스 영화를 보러 다녔었다.

그게 우리 시절의 문화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파리는 실제로도 멋졌다.

근대적 풍취가 물씬 풍기던 석조 건물들과

고풍스러운 카페들, 고급품을 파는 근사한 가게.

어마어마한 박물관과 미술관.

겨울이라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로수에서 반짝였다.


유학 중이던 지인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바에 갔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나왔던 술 '깔봐도스'를 주문했다.

술은 못 마셨지만 레마르크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을 위해 '깔봐도스' 한 잔은 높이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평온한 듯 보이는 삶에서도 사람은 때때로 존재가 짓뭉개지는 괴로움을 느끼는데,

전쟁에서 한 개인은 얼마나 쉽게 짓이겨지는 미약한 존재이던가?



베르사유 궁전에 갔다.

정말 크고 넓었다.

우리나라 궁궐처럼 왕의 집무실과 거처에 그치지 않고,

왕을 중심으로 귀족, 관리들이 거처하는 장소였으니 규모가 커야 했겠지.

궁전 내부를 둘러보려는 관람객이 많았다.

줄을 지어 한 바퀴.

그 큰 공간에 엄청난 재화가 퍼부어졌더라.

빈틈없이 장식된 궁전은 얼마나 화려하고 복잡하던지.

기세 등등한 왕의 세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처음의 감탄은 곧 시들시들해지고,

침실을 볼 무렵에는 아주 피로해 있었다.

화려함으로 빼곡하게 치장된 넓고 높은 공간은 꽤 썰렁하게 느껴졌다.

휑한 구석에 덜렁 놓인 침대.

침대에 캐노피가 달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휘장으로 가리지 않는다면 무서워서 잠을 못 이룰 방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담백하고 비어있는 은은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몸을 쉬어야 마음이 휴식을 얻을 텐데,

호사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인 듯

금색으로 치장하고 당대 최고의 기술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too much 한 궁전은,

모든 것이 너무나 과해서.

피로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집에 두고 온 내 방이 떠올랐다.

빛이 쏟아지는 남향의 커다란 창과 나무.

아침에 깨어 팔을 뻗어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솔솔 얼굴을 스쳐가지.

겨울에는 춥고 장마철에는 습기도 찼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침실이 춥고 습한 건 내 방보다 더할 것으로 보였다.



그 뒤로도 궁전을 많이 구경 다녔다.

마음에 드는 궁전도 있었다.

멋진 건물과 질서 정연한 조경은 대단했지만,

그럼에도 종종 음습하고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이라 그런지 돌로 지어 그런지,

커다란 침실은 하나같이 적막하고 외로워 보였다.

멋진 왕자와 예쁜 공주의 지순한 사랑을 그린 동화책을 읽고 자라면서

왕가와 궁전에 대한 환상을 한껏 키워왔던 나.


사람의 사이즈를 훨씬 넘는 으리으리 한 돌집에는,

따듯한 방바닥도 없이.

소리가 울리는 빈 공간에

높은 침대와 무겁고 치렁치렁한 옷.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세상은 저 멀리 있어서

내겐 너무 불안해 보였다.


궁전의 공주님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자유롭고 홀가분한 내 처지가 고마웠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AMTRAK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