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동부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유니언역으로 갔다.
역사는 크고 높고 아름다웠다.
현 세기의 기술과 부유함을 상징하는 시카고 마천루들 사이에서,
지난 세기의 건축물은 우아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카고를 떠난 기차는 남쪽으로 내려간다.
끝없는 벌판 인디애나와 오하이오를 지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일단 내릴 예정이었다.
아마 하루 정도가 걸렸던 가물가물한 기억이다.
미국 내에서는 사람들이 지역을 이동할 때 몇몇 대도시와 주변 베드타운을 잇는 통근열차가 아니라면,
자동차와 비행기가 주요 수단이라고 들었다.
그때, 그러니까 1990년 대 초.
미국 기차, 즉 AMTRAK 은 여객 운송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는데,
기차 안에는 주로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 보이는 노인, 장애인, 외국인들이 띄엄띄엄 타고 있었다.
일반석이라 그랬는지 객차는 우리나라처럼 좌석이 주르르 놓여있었는데,
자국민의 체격을 반영하듯 좌석이 상당히 컸던 기억이다.
(일본에서는 기차 좌석이 좁다.)
나는 창밖으로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가, 여행안내 책자도 읽다가.
간식을 우물거리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가방 정리를 하고, 지도로 기차의 궤적을 확인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미국 땅은 정말 넓었다.
기찻길 저편으로 도저히 사람 발길이 닿을 수가 없었을,
태곳적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싶은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넓은 들판을 한참 지나서 가끔 작은 도시가 나타나고, 기차는 역에 정차했다.
평원 어디쯤에서 젊은 외국인 가족이 탔다.
아기를 안은 부인과 너덧 살쯤 된 여자 아이가 기찻칸으로 먼저 들어왔는데,
트렁크와 가방을 잔뜩 맨 남편이 뒤를 따랐다.
검은색 차도르로 온몸을 감싼 아기 엄마는 훌쩍 큰 키에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마침 내가 앉은 자리 비스듬히 뒤에 앉게 되어 내게 그 가족의 움직임이 일일이 감지되었는데.
너덧 살 누나는 엄마 품에 안긴 꼬물꼬물 한 순둥이 남동생을 어찌나 못 살게 굴던지.
부모가 제지하면 아기를 때리고 꼬집으면서 부모를 더 힘들게 했다.
아이가 얼마나 심심하면 저럴까, 에서
아이에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나 보다, 이해를 해보다가.
나보다 어릴지도 모르는 저 부부는 또 얼마나 힘들까, 하는 심정에서 나는 아이를 불렀다.
말이야 서로 안 통했지만 먹을 것을 꺼내 주고 마침 부활절 즈음이라 길동무 삼아 샀던 토끼 인형도 주고, 알파벳도 같이 읽고.
똑똑하네, 예쁘네, 했더니
알아들었는지 까르르 웃을 정도로 아이는 기분이 괜찮아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현하던 영어가 안 되던 그 부모는,
아마 점점 웃음이 줄어들고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내 상태에 미안했는지.
싫다는 아이를 데려가고.
뜻하지 않은 육아도우미 노릇에 지친 나는 곤한 잠에 빠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잠에서 깼다.
아이는 소리치고 울며 떼가 한창이었다.
내가 아이를 다시 불렀을 때 그 엄마는 보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딸로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객차의 승객들 사이에는 침묵 속에서 아이의 행동을 둘러싼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아이가 다시 내 옆에 앉았을 때 아이는 훨씬 더 건방져져서,
내 가방을 열어 물건을 꺼내고, 물건을 던지면서 계속 나의 주의를 끌어내려했다.
이목구비 또렷한 예쁘장한 아이는 행동은 영 밉상이었는데.
그래도 기차 안의 평화와 안절부절못하는 부모를 봐서 기필코 아이를 토닥여야 하는 상황.
창밖은 어두워졌고.
아이는 자기 기운이 바닥날 때까지 맘껏 심술을 부렸다.
잠에서 깨었을 때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해가 떠오른 들판 한가운데 작은 역에 서있었다.
마중 나온 대가족이 막 기차에서 내린 한 여자와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붉은 뺨과 튼튼한 팔뚝을 가진 비슷하게 생긴 가족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지에 탄탄히 뿌리박은 이 가족도 선조들은 몇 개의 보따리를 들고 멀리서 떠나왔겠지.
자신이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때때로 고달픈 타향살이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스름한 아침, 어느 도시에 여러 개의 가방과 처자를 데리고 내렸을,
구레나룻 덥수룩한 젊은 남편과 조용한 그의 아내를 떠올렸다.
미국이 잠시 머무는 곳일지,
잘 살기 위해 도착한 희망의 땅일지 사연은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미국에 있게 된다면 그들 가족이 겪어내야 할 일상적인 전투의 무게와.
다른 성장 배경을 갖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간극이 어렴풋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몹시 아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