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함, 칠판 위에 남은 마음들

마음이 지나간 자리 18화

by 전태영

열 여덟번째 감정, 훈훈함

세상을 바꾸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KakaoTalk_Photo_2025-12-30-13-44-29-14.jpeg

이제 방학을 앞두고, 나에게 주어진 수업이 모두 끝났다. 교실의 시간은 늘 활기찼지만,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난 뒤의 교실은 유난히 고요했다. 책상 위에 남겨진 흔적들과 칠판에 희미하게 남은 분필 자국을 바라보며, 지난 1년 반의 시간을 천천히 되짚어 보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단순히 교과서를 넘기며 보낸 나날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나눈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는 내가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순수함과 다정함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몇몇 장면들은 유난히 더 따뜻한 기억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교실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된 어느 날의 수업이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분들 중에서, 국제기구에 후원하고 있는 개인이나 단체를 한번 찾아봅시다.”

처음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다 학생들의 손이 하나둘씩 조심스럽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중 한 아이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직접 후원하고 있는 단체가 있는데, 적어도 될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오히려 더 고마운 이야기지.”

그때였다.
칠판 위에 아이들의 이름과 함께 적히기 시작한 단체 이름들이 내 눈길을 붙잡았다. 월드비전, 초록우산, 굿네이버스, 유니세프...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직접 후원하고 있는 국제기구의 이름이 교실 가득 채워졌다.

‘이 나이에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다니.’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후원의 금액이 얼마인지, 얼마나 오래 이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는 일을 이 아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고맙고 대견해서, 내 마음 한편이 조용히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아이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충분히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고 소중한 마음들이 모여 언젠가는 세상을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아이들이 바로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사실 훈훈함은 멀리 있지 않다. 대단한 업적이나 거창한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쓰는 아주 작은 행동 속에서 조용히 찾아온다. 오늘 교실에서 내가 느낀 마음의 온기가 바로 그렇다. 작지만 깊고, 그래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따스함. 방학을 앞둔 지금, 나는 이 장면을 가장 따뜻한 수업의 기억으로 마음에 고이 접어 둔다.

화, 금 연재
이전 17화당당함, 내려놓고 다시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