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행복했다고.

하루치의 따뜻함 06

by 전태영
<하루치의 따뜻함, 여섯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시간은 어느새 여섯 번째 이야기를 품고 흘러왔습니다. 퇴직을 앞두고 조용히 써 내려간 이 작은 기록이 누군가의 하루에 따뜻한 숨결로 닿고 있다는 걸 느끼는 요즘,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잠시 멈추어 쉬어가고 싶은 날, 이곳에서 따뜻한 문장 하나를 만나실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하루치의 따뜻함’을 천천히 이어가봅니다.


올해처럼 무더운 여름도 없었다. 이 더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해외여행도, 특별한 이벤트도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하루 휴가를 내고 식탁에 둘러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 우리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바람 쐬러 갈까?


그 한마디에 아들과 내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 소박한 제안 하나가 이렇게 큰 설렘이 될 수 있다니. 그 순간,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셋이 둘러앉아 마치 거창한 피서 계획이라도 짜는 듯 여행 일정을 만들었다. 무엇을 할지보다 누구와 함께할지가 더 중요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우리의 소소한 여정, 목적지는 동해 바닷가, 포항이었다.


사실 우리는 결혼한 지 35년이 되었지만, 마음 편히 여름휴가를 다녀온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아내와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남들처럼 해외여행도 가고, 다양한 추억을 만드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그들과 우리의 삶은 어쩌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들이 어렸을 땐, 여름이면 어김없이 트렁크에 텐트를 싣고 영덕 장사해수욕장으로 향하곤 했다. 10여 년을 그렇게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소박한 여행들이 우리 가족만의 소중한 피서였고, 그 기억이 내 마음속 미안함을 조금은 덜어준다.


올해도 멀리 떠나진 못했다. 포항 바닷가, 그곳이 올해 우리 가족의 첫 피서지였다. 하지만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시집 간 딸과 든든한 사위까지 함께하는, 작지만 정겨운 여행이 또 한 번 아름답게 펼쳐질지도 모르니까. 다음 날 아침.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아내는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분주히 짐을 챙겼고, 언제부턴가 장거리 운전은 자연스레 아들의 몫이 되어 있었다. 차에 오르자 아내는 뒷좌석에서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고, 앞좌석에서는 교직의 길을 함께 걷는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 이야기, 교직의 즐거움과 고민, 동료들과의 소통, 그리고 살아가는 마음가짐까지.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 공감으로 이어졌고, 가끔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마음이 오갔다. 군위휴게소에 도착해 마신 커피 한 잔, 따끈한 호두과자 한 입. 그 평범한 풍경조차 소소한 여유가 느껴졌다.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셋이 나란히 쉬던 그 순간, 길 위의 작은 쉼표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포항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현지인들에게 입소문이 자자한 물회집이었다. 싱싱한 해산물과 시원한 육수가 입 안 가득 퍼질 때, 더운 여름날의 피로도 함께 녹아내렸다. 셋이 마주 앉아 눈을 맞추며 나누는 한 끼 식사. 그 소박한 풍경 하나만으로도 여행은 이미 절반의 성공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포항의 대표 재래시장인 죽도시장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간질이는 바다 내음,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정겹게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시장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갓 잡아올린 생선들과 해산물, 지역 특산물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좌판을 따라 걷는 길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아내는 조기 한 꾸러미를 들고 조심스레 웃었고, 아들을 떠올리며 반찬거리로 황태도 골랐다. 나는 유난히 싱싱해 보이는 해삼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고를게”라며 한 봉지 샀다. 그렇게 몇 가지를 바리바리 들고 나오면서도 마음은 괜히 든든하고 풍요로웠다. 비록 대단한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계획에 없던 쇼핑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일상과 여행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기분 좋은 풍경이 완성되었다. 시장 바깥으로 나오자 늦여름의 햇살이 슬며시 기울고 있었고, 우리는 무거운 장바구니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안고 다음 여정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다음 들른 곳은 포항 근대문화역사관이었다. 조용한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 세월이 켜켜이 쌓인 건물의 결이 피부로 전해졌다. 포항의 과거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전시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도시의 깊이와 시간의 무게를 함께 느꼈다. 특별히 화려하지 않았지만,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우리는 영일대 바닷가에 도착했다. 노을이 바다 위로 서서히 내려앉던 그 시간,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아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발끝에 닿는 시원한 물결,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조용히 나누는 대화,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던 그 순간. 바다는 조용했지만, 그 품속엔 말없이 전해지는 위로가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셋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참 좋다, 오늘 하루.


돌아오는 길. 햇살은 어둠으로 바뀌었고, 차창 밖 불빛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라디오에서 흐르던 음악, 묵묵히 운전하는 아들, 뒤에서 졸고 있는 아내, 그리고 마음속 깊이 내려앉는 고요한 평온. 크게 대단한 무엇을 하지 않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눈 하루였다. 오늘 밤, 평범한 여름날이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은 하루였다. 그날의 햇살과 파도, 시장의 소리와 근대 건물의 숨결,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함께한 가족의 따뜻한 존재감. 어쩌면 그 하루는 내게 평생을 지탱해 줄 소중한 기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서재에 앉아 하루를 되짚으며 이 글을 쓴다.


그저 가족이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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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