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05
<하루치의 따뜻함, 다섯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계절이 흐르고, 마음도 함께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요즘입니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정한 손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하루치의 따뜻함’을 천천히 꺼내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소한 변화들이 전해주는 사랑을 기록합니다.
새집으로 이사 온 지도 어느덧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부터 사용해 온 오래된 가전제품들은 그대로 우리와 함께했다. 오래된 물건들이지만, 그만큼 추억도 깊었기에 쉽게 바꾸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변화는 안마기였다.
회갑을 맞은 나를 위해 사위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다정하게, 조용히 내민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랑으로’라는 이름의 안마기. 그 브랜드명조차 그의 마음 같아 뭉클했다. 사실 나도 아내도 요즘 들어 안마기가 하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루 종일 쌓이는 피로에 어깨가 뻐근하고 허리가 무겁던 날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선뜻 사지 못하고 미뤄두고만 있었던 터다. 그런 우리 마음을 어찌 알고, 그는 말없이 먼저 다가왔다. 거실 한 켠에 자리 잡은 안마기는 이제 우리의 하루 끝에 따뜻한 쉼표가 된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순간, 굳어 있던 근육은 풀리고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이 안마기는 단순히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위의 따뜻한 마음이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말로 다 하지 못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두 번째 변화는 나의 서재 공간을 새롭게 꾸민 일이었다.
딸과 사위, 그리고 아들이 오래된 책상과 가구를 정리하고, 새 조명과 의자, 아빠를 생각하며 고른 소품들로 공간을 하나하나 채워 넣었다.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아빠가 더 편하고 즐겁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한 마음의 선물이었다.
그날 완성된 서재는 단지 작업 공간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쉼터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이 공간을 가장 사랑한다.
세 번째 변화를 준 것은 바로 벽걸이형 대형 80인치 TV 설치였다.
딸과 사위, 그리고 아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뜻밖의 선물이었다.오래되고 낡은 TV가 거실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게 왠지 마음 한편에 걸렸던 모양이다. 새로 들여온 대형 화면은 스포츠채널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마치 현장에서 경기를 보는 듯한 생생함을 선사했다. 아내도 드라마를 좋아하는 만큼, 더 넓고 선명한 화면 앞에서 한층 더 깊이 빠져들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TV 한 대로 카페 수준의 힐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변화는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한 에어컨이었다.
거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그 낡은 에어컨은, 이전 아파트 시절부터 함께 한 물건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점점 냉방 성능은 약해졌고, 기계가 내는 소음은 점점 커졌다. 여름이면 더위에 지친 날들이 많아도 에어컨을 켜기보다는 선풍기에 의존해 지냈다. 그렇게 무더운 계절마다 불편함을 참고 견디며 지냈지만, 이제는 바꿀 때가 왔음을 모두가 느꼈다.
“이제는 바꿀 때가 되지 않았어요?”
조심스레 꺼낸 아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여름마다 되풀이되는 불편함과 인내. 이제는 바꿔야 할 때였다. 우리 집에서 가전제품을 고르는 일은 늘 아들의 몫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부모보다 더 능숙하게 정보를 찾아내고, 제품을 비교하고, 현명한 선택을 돕는 존재가 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부탁을 하자,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신제품인데 성능 좋고, 가격은 200만 원대예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걸로 하자.”
새 에어컨은 두 대. 거실의 스탠드형과 작은 방의 벽걸이형. 부드러운 곡선과 절제된 색감의 디자인이 집 안 분위기마저 바꾸는 듯했다. 바람이 달라지니, 공간도, 기분도 달라졌다. 에어컨은 이제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지만, 막상 새 제품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기능은 다양하고 정보는 넘쳐나니, 결정은 언제나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들의 도움 덕분에 무리 없이, 가장 적절한 시점에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가격, 성능, 디자인까지 꼼꼼히 따져 부모에게 딱 맞는 제품을 골라준 아들. 고맙고, 든든하고, 뿌듯했다. 이번 여름, 에어컨만큼이나 시원하게 마음을 데워준 건, 바로 그 고마움이었다. 새 에어컨이 들어온 이후, 우리 집은 조금씩 달라졌다. 덥다고 짜증 섞인 말이 오가던 부엌에는 다시 웃음이 돌았고, 식사 시간은 여유로워졌다. 아내는 “이번에 바꾸길 참 잘했어요”라고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가, 한 가족의 여름을 설명해 주었다. 아내는 좋은 에어컨이 새로 들어왔으니 빵빵 틀어 봅시다. 하고 말한다. 이전같으면 전기세, 전기세 하고 노래를 부르던 아내였는데 말이다.
무더위에도 자연스레 거실에 모이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웃는다.
에어컨 하나 바꿨을 뿐인데, 가족의 동선이 바뀌고, 표정이 달라지고, 말수가 늘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좋아하는 스포츠 채널을 돌릴 수 있는 지금이, 참 소중하다. 이제는 ‘집이 제일 시원하고 편하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진심이 되었다. 우리는 배웠다. 거창한 변화 없이도, 삶의 결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비싼 여행이나 값비싼 선물보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와 그 속에서 웃고 있는 가족의 얼굴이 훨씬 더 큰 행복이라는 걸. 이번 여름, 우리는 다시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리고 그 중심엔, 조용히 부모를 생각해 준 아들과 딸, 사위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이제는 소파를 바꿀 차례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의 사랑은 계속해서 집 안 구석구석에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다.
다섯 번째 변화는 진행 중.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