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루치의 따뜻함 03

by 전태영
<하루치의 따뜻함, 세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2025년 여름, 퇴직을 앞둔 오후의 교실에서 시작된 기록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하루의 따뜻함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 글들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잔잔한 온기가 되어 잠시 쉬어가고 싶은 날,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세 번째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며칠 전,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우연히 멈춰 선 곳이 있다. 연탄재 수거함 옆, 거무죽죽한 벽면에 누군가 또박또박 적어놓은 시 한 줄이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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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순간, 마치 벽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익숙한 시였지만, 그날의 그것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교과서나 시집 속이 아니라, 다 타고 남은 연탄재 3장이 실제로 덩그렇게 쌓여 있는 자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 시는 더는 문학이 아니었다. 삶이었다.


연탄재는 더럽고, 쓰고 난 뒤엔 쓸모없고, 누구도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래엔 분명, 한때 누군가의 방을 데워주던 작고도 뜨거운 온기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차갑게 식어버린 재 위에 놓인 그 시는, 더없이 뜨거웠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 이 문장을 남긴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차가운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 한 줄의 시를 남기며 누군가의 마음까지 데우고 싶었던 걸까.


그날 이후로 나는 시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벽에, 골목에, 표지판에 쓰인 문장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군가의 삶이 스쳐간 자리에, 그 마음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걸.

나는 문득 나 자신에게도 물어보게 된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을까


시 한 줄이 나를 흔들었고, 그 질문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서 잔잔히 불을 피운다.


그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없기에,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를 뜨겁게 안아주었던 기억,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던 순간들, 혹은 미처 다 건네지 못한 마음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를 대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떤 온도로 남을까. 따뜻했던 기억으로, 혹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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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벽에 쓰인 한 줄의 시가 내 마음을 데웠듯,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그렇게 살짝 덥혀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를 찾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어쩌면 삶의 틈 사이에서 마음을 읽고, 마음을 건네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날처럼, 문득 멈춰 서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다시 보는 일.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나도 누군가에게 ‘한 줄의 시’처럼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짧지만 오래 기억되는, 따뜻한 문장 하나처럼.

생각해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준 적이 있었을까. 말없이 건넨 위로 한마디, 지친 하루에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마음 하나라도 내어준 적이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그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마음을 전하는 일이 어쩐지 어색하고, 때론 내 안의 여유조차 없었던 날들. 그렇게 나는 누군가에게 외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데워줄 수 있었던 기회 앞에서, 나는 말없이 돌아선 적도 있었으리라. 그런 생각에 이르면, 나는 문득 연탄재 만도 못한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한때는 불꽃을 품고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했던 연탄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조금 더 용기 내어 건네고 싶다. 말없이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사랑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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