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07
<하루치의 따뜻함, 일곱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퇴직을 앞두고 조용히 써 내려가던 이 기록들에 뜻밖의 공감이 찾아온 날이 있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 선수가 은퇴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 역시 '퇴직'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지켜낸 사람의 퇴장은,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자 지난 시간을 스스로 껴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하루치의 따뜻함’을 천천히 이어 적어봅니다. 이 글이 당신의 하루에도 작은 숨결처럼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은퇴 이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
그 중 한 분은 얼마 전 김천의 작은 카페에서 만난 노부부였다. 지인을 따라 들어선 조용한 카페, 그곳엔 백발이 성성한 70대 부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서울에서 긴 세월을 일하고 퇴직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직접 꾸민 공간이라고 했다.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던 두 분의 얼굴에서 삶의 평온함이 전해졌다. 그날 마신 라떼 한 잔의 온기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은, 그 공간을 가득 채운 두 사람의 따뜻한 삶의 온도였다. 묻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분은 그라운드 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난 어르신이다. 70세는 훌쩍 넘어 보이는 인자한 인상의 어르신이 혼자 운동을 하고 계셨다. 가볍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 혼자서 이렇게 운동하시네요?”
그러자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서울에서 근무하다 퇴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여기 나와서 골프도 치고 사람들도 만나고, 혼자서 퍼팅하고 걷는 시간이 참 행복하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3시간쯤 걷고 나면, 밥맛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두 분 모두, 은퇴 후에도 삶을 여전히 따뜻하게 가꾸고 계셨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하지만 풍성하게. 그들의 삶은 말보다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 역시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 이후에도 삶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또 하나의 은퇴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 ‘끝판왕’ 오승환 선수가 그라운드를 떠난다는 소식.
그의 이름 앞엔 ‘549세이브’, ‘돌직구의 아이콘’, ‘황금세대의 상징’ 같은 찬란한 수식어들이 따라다녔다. 그토록 단단하고 당당했던 그도 결국, 내려서는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그 뉴스를 읽다가 문득, 나 자신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이제 나도 6개월 후면 정년퇴직이구나’
나는 교육계에서 오랜 시간을 걸어왔다. 교사로 시작해, 장학사로, 교장으로, 교육장으로… 그리고 지금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원로교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곁에 있다. 교육장 임기를 마쳤을 때, 그냥 퇴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현장으로 돌아가길 택했다. 마지막까지 교단에서 아이들과 호흡하며 ‘교육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한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 다음 장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퇴직이라는 단어가 멀지 않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고 두렵진 않다. 이제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늘 위를 향해 달려왔다. 무언가를 이루고, 한 계단 더 오르고,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 그것은 분명 소중한 성취였고, 우리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처럼,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동안은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책임감에 짓눌려서, 내 삶의 가장 작은 기쁨을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이들을 위해, 동료를 위해, 지역 교육을 위해 헌신해왔지만 이제는 나를 위한 삶도 살아보고 싶다. 주변의 은퇴한 선배들을 보면, 모두 제각기 아름답게 살아간다.
누군가는 매일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누군가는 글을 쓰며 인생의 이야기를 엮고, 또 누군가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하루하루를 자신답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가고 싶다. 하루 한 시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누군가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기도하고, 침묵하고, 나를 향한 질문에 귀 기울이며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아가고 싶다. 생각해보면,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나의 인생에서 이제야 비로소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승환 선수는 '끝판왕'으로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시작을 할 것이다. 나 또한, 내 인생의 ‘시작왕’으로 남고 싶다. 그동안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이제 그 경험을 발판 삼아 더 깊은 나, 더 자유로운 나, 더 평안한 나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산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 핀 이름 없는 들꽃 하나를 바라보는 시간일 뿐이다. 그제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도 아름다웠고, 앞으로 살아갈 삶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색으로
제2의 삶을
조금씩, 그러나 깊이
행복으로 물들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