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대체 뭐니?
8/ 현(現)-2
휘나는 잠에서 깨어나 수줍은 얼굴로 한참동안 앉아 있다가, 비장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
복순이는 휘나의 집 603호 현관 앞에 도착해 숨을 돌렸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무엇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질투.
복순이는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말해 복순아, 그래서 달려왔잖아. 어서 초인종을 누르고 말해, 차복순!
난 아니라고, 하늘에서 떨어진 핫배지를 주운 거라고, 지금 오빠가 마음 가는 사람, 시은이 언니를 거부하지 말라고.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소나기처럼 오는 것이니까! 제발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지 말라고.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숨이 진정될 때까지 망설이던 복순이는 결국 현관 문 앞에서 등을 돌렸다. 바로 그 때다. 문이 열렸다.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본 복순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휘나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
휘나도 깜짝 놀랐다.
“오, 오빠…….”
“여기서 뭐해?”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복순이는 바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휘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말한다.
“드, 들어와. 괜찮겠어?”
복순이가 망설이자 휘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냥, 나가자. 어차피, 나가는 길이었으니까.”
복순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파트 놀이터,
두 사람을 태운 그네가 서로 엇갈리며 흔들리고 있다. 신발 끝으로 모래를 그으며 멈추는 그네 하나.
휘나가 그네에서 내리며 말한다.
“할 말 있다고 했잖아?”
복순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그게…….”
“…….”
“그냥,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보고 싶었어요.”
휘나는 여자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게 처음이라 얼굴이 빨개졌다. 복순이도 처음 말하는 거라 당연히 얼굴이 빨개졌다.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쌩하고 부는 그 때 복순이가 그네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이만 갈게요.”
“…….”
휘나가 아무 말도 못하자 복순이는 뒤돌아 뛰어가 버렸다.
“보, 복순아!”
휘나도 할 말이 있어 복순이를 붙잡았다. 아니, 지금 꼭 말해야만 했다. 나, 사실은 시은이를 너무 좋아한다고, 매일 시은이 때문에 괴롭다고, 우리는 그냥 좋은 오빠 동생으로 남자고. 나, 핫배지 정보 시은이 코드로 바꾸고 말았다고. 용서해 줘, 나 지금 시은이에게 사랑 고백하러 가는 길이야!
“아빠가 기다려요. 문자 보낼게요!”
그러나 복순이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휘나도 멍하니 손만 흔들고 있다.
집에 도착한 복순이는 신발을 벗는 순간 깨달았다. 함께 있었어도 핫배지가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 미쳤어? 달밤에 체조하게? 지금이 몇 시야 이년아!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머리 위에서 레이저부인의 광적인 저주가 마구 퍼부어지고 있었다.
***
“하아……. 하아…….”
밤을 가르는 거친 숨소리. 불빛 찬란한 도시를 질주하는 소년의 손에는 하얀 백합이 한 다발 들려있었다.
휘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래, 말하겠어. 시은아, 사랑해! 네가 좋아하는 백합도 준비했어.
휘나의 등 뒤로 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역시 수소연료 택시다. 휘나는 곧 택시에 올라타 말했다.
“평창동, 129번지요.”
휘나가 외우고 있는 시은이의 집 주소였다.
택시는 휘나를 태우자마자 총알처럼 달린다. 예감이 좋은 탓일까? 아니면 하늘이 알아서 돕는 것일까?
뻥 뚫린 도로에는 휘나를 태운 수소연료 택시만이 매끄럽게 질주하고 있었다. 엔진소리가 무척이나 조용했다.
가로등 불빛이 강물처럼 흐르는 창가에 살이 빠져 광대뼈가 훤히 드러난 휘나의 얼굴도 함께 흐른다.
“저기 저, 큰집이었구먼.”
골목길로 접어든 택시기사는 창문 밖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말했다.
“저기, 큰 소나무 많은 기와집이요?”
휘나도 창문을 통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근방에서 가장 큰집을 가리키며 묻는다.
“저 집이 아마 배화재단 셋째 아들집일 거야……. 배화가문에서 가장 깨끗하고 소박하다고 소문났지. 저게 소박한 거면 우리 집은 완전 닭장이네. 우리는 언제 저렇게 하고 사나. 부럽다, 부러워.”
택시기사가 핸들을 잡아 돌리며 신세한탄 한다.
“잠깐만 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여기서부터는 걸어갈게요.”
휘나는 택시에서 내려 주택가 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택시기사가 휘나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재벌가랑 도통 인연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니라. 휘나 역시 시은이가 소문만 무성하던 재벌 2세라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담 길을 걷는 휘나는 과거 민희와의 악몽이 떠올라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은 반드시 고백할 거라고, 택시 안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그저 모든 것이 장난이고, 철없는 재벌 2세가 재미로 날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좋아.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최악의 경우, 민희처럼 다른 놈을(별주부)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좋아.
고백하겠어.
사랑한다고 하루에 86400번은 말하지 못할지언정, 오늘은 반드시 사랑한다고 고백하리라 마음먹고 또 마음먹었다.
담 모퉁이를 따라 기와지붕 제일 높은 곳이 살짝 보이는 순간이었다. 휘나의 왼쪽 가슴에 착용되어있는 Ai 핫배지가 하얗게 반짝이며 진동했다.
휘나는 대문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다렸다.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고 있는 그 때, 대문 건너편 멀리에서부터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미쳤어? 라고 처음 말을 걸어오던 그 때보다 더욱 가볍고 경쾌한 발자국소리다. 휘나가 턱을 세워든 순간, 대문천장의 불이 환히 켜지더니 딸깍! 하며 육중한 철제 대문이 살짝 열렸다.
조명에 반사된 휘나의 얼굴.
입 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가 생겨났다. 그런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운 시은의 하얀 얼굴도 대문 틈 사이로 빠져 나온다. 하얀 뺨을 가르는 푸른 정맥. 그 앞에 등장한 하얀 백합 다발, 휘나가 내밀었다.
“나야.”
휘나가 씩 웃으며 말한다. 시은은 백합을 들이대며 활짝 웃는 휘나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잘생긴 코와 고른 치아가 조명에 반사되어 무척이나 눈부셨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더니.
자신감 넘치고 생기발랄한 휘나의 미소를 시은은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시은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인다.
곧 휘나의 가슴에 꽂혔다. 하얗게 불을 밝히고 사납게 울고 있는 핫배지.
시은의 귀에서도 핫배지가 사납게 울고 있다. 시은은 귀가 몹시 간지러웠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만 보던 시은은 귀에서 핫배지를 빼며 차갑게 말한다.
“미쳤어?”
문에 가려 왼쪽만 보이는 시은이는 공주처럼 하얀 원피스 잠옷차림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문에 몸을 숨기느라 버티고 있는 왼쪽 허벅지가 실루엣처럼 드러났고, 날씬한 하얀 종아리가 치마 끝자락 밑으로 훤히 보였다. 섹시한 빨간 색 비키니 슬리퍼를 신고 있는 조그마한 발도 왼쪽만 보인다.
휘나는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휘나가 아무리 계집애처럼 생겼다고 해도, 남자 아닌가! 휘나는 시은이의 잠옷, 그 품에 쏙 파묻혀 두 다리를 꼭 껴안고 싶었다. 순간, 기분이 묘해지며 소름이 확 돋아났다.
“응, 미쳤어.”
침착하게 대답한다.
“너, 지금 몇 신지 알아?”
“몰라? 몇 신데?”
“열두 시야.”
“그런 넌, 이 시간까지 잠 안자고 뭐하냐?”
“자다가 깼지!”
“배지 울려서?”
“그래.”
시은이는 화났다는 듯이 턱을 올리더니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말한다. 아, 귀여워! 휘나는 결국 마음먹고 말했다.
“시은아, 나 할 말 있어서 왔어. 잠깐 나와 봐.”
“이런 꼴로 어딜 나가.”
시은은 창피하다는 듯이 몸을 더욱 숨기며 말했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상태다. 한참 잠들었다가 핫배지가 귀에서 울려 깜짝 놀라 깼다. 설마 휘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옷 입고 나올 게, 잠시만 기다려.”
뒤돌아 뛰어 올라가는 시은이를 휘나는 서둘러 잡았다.
“시, 시은아. 잠깐만!”
돌계단 위에서 시은의 발이 굳은 듯이 멈추었다. 휘나는 대문에 가려진 시은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냥, 나오지 않아도 돼. 거기서 그냥 들어.”
시은의 작은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막상 말하려니, 휘나는 긴장되었다. 사랑고백, 이제 시작이다!
진정 하늘이 굽어 살피셔서, 성공한다면 이 천사 같은 아이가, 이 예쁜 아이가, 이 귀여운 아이가,
내 여자가 되는 거야!
“시은아! 언제부터냐 하면, 그, 그게…….”
“그러니까, 그, 그게…….”
“…….”
시은이 천천히 몸을 돌린다.
“시은아, 그러니까. 언제부터냐 하면……. 내가 인성이한테 얻어맞을 때 네가 인성이에게 덤볐잖아…….”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까, 옛날 일이 생각나서 쪽팔린다. 이렇게 말 할 필요가 없잖아! 언제부터 반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사랑한다는 것이 중요하잖아!
“시, 시은아! 그, 그러니까!”
다시 차분하게 말하려 노력하지만, 자꾸 혀가 말라붙어 말이 더듬어졌다. 그 때 시은이가 대문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어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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