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
10/애(愛)
마당한편,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 상추가 싹을 돋았다. 단비는 즉흥환상곡을 크게 튼 후, 텃밭으로 나가 여린 상추 앞에 섰다. 수도꼭지를 틀고 총처럼 생긴 분무기를 누르니 물이 시원하게 쏴! 하고 퍼진다. 어린상추 잎에 물방울이 뿌려진다. 단비의 속도 시원하다. 즉흥환상곡이 울려 퍼진다. 한 곡만 계속 반복되게 설정 해두었다.
비상사태라 잠은커녕 앉아서 쉬지도 못했다. 국제회의 요원들과 싸움으로 뜻하지 않게 얻게 된, 달콤한 휴식이었다. 분무기에서 흩어지는 물은 햇빛에 비추어 찬란한 무지개를 만들었다. 예쁘다. 무지개를 잠시 감상하던 단비는 호수를 잡아 이끌어 화단전체에 물을 골고루 뿌렸다. 벚나무에도 물을 잔뜩 뿌려준다. 봄에 벚꽃이 만개하면 무척이나 아름답다. 단비는 행복했던 날들과 마당의 화려한 봄날을 생각하며 물을 계속 뿌린다.
지하세계 총 공격이 이루어지면 아빠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하염없이 물만 뿌리고 있다.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하얀 와이셔츠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햇살, 무지개 그리고 하얀 실루엣. 분무기의 물은 시원하게 잘 쏟아진다. 화단이 촉촉하게 젖는다.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었다. 언제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이런 풍경을 이미 경험한 것 같았다.
단비는 문득, 자신의 모습이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분무기를 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미쳤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데쟈뷰(*Dejavu, 뇌가 저장된 기억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기억의 착각이나 신경세포의 혼란으로 정보전달이 잘못되면 일어나는 현상으로 밝혀졌다. 평행우주론에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헌데, 착각이 아니었다. 마당의 화단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를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단비는 울긋불긋 움직이는 화단의 화초를 본다.
바로 그 때였다. 상추 잎이 들썩거린다. 키 작은 비닐하우스가 들썩인다. 땅이 솟아오른다. 단비는 순간, 장식장 위에 거치 된 아빠의 마사무네를 본다. 천으로 돌돌 말려있어 뽑을 수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마사무네를 집어 들고, 마당으로 다시 달려 나왔다.
─오늘 아빠는 다 찾았구나, 라고 생각하며.
***
“하아, 하아. 난 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어.”
박주용은 무릎을 꿇고 숨을 힘겹게 쉬며 말한다. 대머리를 노려본다. 대머리는 킥킥! 웃을 뿐이다.
박주용은 급히 실험실을 빠져나와 로비로 급하게 나오긴 했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지를 모르겠다. 대충 한 동네라는 것은 알지만 주소와 정확한 위치 없이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주용은 즉시, 핫브레이슬릿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서로 같은 코드끼리 반응한 상태라 상대방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박주용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는 비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집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내고 있다니, 저 예쁜 계집애를 말이다. 역시 예쁘고 봐야해.
전화기를 붙잡은 박주용의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애가 타는 표정이다.
집으로, 또는 핸드폰으로 또는 핫브레이슬릿으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박주용은 밖으로 튀어나가, 자가용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다.
─청계4가 27번지.
***
방안에서부터 전화벨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핸드폰도 울린다. 단비는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분명 무엇인가가 솟아 올라왔는데,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굉장한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핫브레이슬릿이 반응하지 않는다. 핫브레이슬릿이 고장 났나하며, 액정을 내려다보는 순간, 단비는 깜짝 놀랐다. 온 몸에 소름이 잔뜩 돋아났다. 박주용으로부터, 한 통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있었다.
단비는 즉시 거실로 튀어 들어갔다. 전화기에서 번호를 확인한다. 같은 번호, 세상에나 그 잘난 남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단비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긴장이 흥분으로 교체되며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디오를 끄고 CD를 빼서 거울대신 얼굴을 보며 진정하자, 진정하자 하며 숨을 고르는 순간, 눈앞에 환상이 펼쳐진다. 고양이가 아른거렸다. 고개가 자꾸 돌아가고 몸이 바닥으로 눕혀진다.
사랑을 원하는 진실한 마음은, 삶의 집착으로 이어졌고, 삶의 집착은 집착하는 그 만큼 고양이로 변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두려움으로 변해 악성호르몬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뇌가 다시 압박 받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뇌를 또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몸 속, 혈관을 타고 고양이들이 기어 다니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더듬이 같은 양쪽 두 갈래 머리카락이 꿈틀거린다. 일본인에게 잘렸던 한쪽 머리카락이 똑 같이 쑥 자라났다.
순간, 올림픽 주경기장 한 가운에서 식인귀에게 잡혀 먹히는 기인들의 아우성이 들려온다. 그 참혹한 현장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고양이가 고막을 뚫고 들어가는 착각과 함께!
기도를 뚫고 들어가던, 그 끔찍한 고통. 온몸을 뒤지며 근원에 도달하려던 수컷고양이들. 그 지독한 공포가 되살아나 또 다시 뇌를 압박한다.
<토울>이 풀어주었던, 화이트브레인이 다시 압박 받아 작아지기 시작한다. 악성호르몬이 거침없이 분비되어 혈액을 타고 온 몸에 흐른다. 이상유전자와 정상유전자의 충돌이 가속화 된다! 고양이 성 페르몬이 또 다시 분비되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은 수컷들이 움직인다.
지독한 고통과 두려움이 온몸을 감싼다.
“아악! 이럴 수는 없어! 싫어, 싫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발작을 시작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실제로 수컷고양이들이 마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벽지사이에서도 쏟아져 나오고, 싱크대 밑에서도 기어 나온다. 마당의 고양이들은 빠르게 거실로 침범한다. 집안에서 터져 나온 놈들과 합류해 단비의 몸에 올라타기 시작한다. 이상유전자를 가진 놈들은 살을 파고, 그곳에 정자를 쏟아낸다. 그렇게도 원하지 않았던 악몽은 결국 또 시작되어버렸다.
단비는 고양이들에게 휩싸여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다행히도 몸은 정상으로 되돌아 있었다.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뭔가 이상하다. 핫브레이슬릿이 은은하게 울리고 있고, 옆에 누군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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