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세요
13/세계를 초월한 약속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벚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어린 단비가 올려다보는 벚꽃은 마치 하늘에 피어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린다.
팔랑팔랑, 노랑나비 한 마리가 단비의 두 손 사이로 들어왔다.
“단비야.”
하며 엄마가 다정한 목소리로 부른다.
단비는 대문을 열어둔 채로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으로 왔다. 유리창 문에 손을 짚고 입술을 비빈다.
“에이, 입술 더러워지잖아.”
엄마는 안에서 말한다. 단비의 입에서 새어나온 숨결이 유리창에 퍼져 흐릿해지는 순간, 콰앙! 하는 폭발소리와 함께 엄마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세상이 출렁거렸다.
잔잔한 수면 위의 파장처럼, 그렇게 세상이 출렁거렸다. 화단도 출렁거렸고, 담도 출렁거렸다. 대문도 출렁거렸고, 단비도 출렁거렸다. 처음 파동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했다. 그러나 두 번째에 이은 세 번째 파동은 굉장히 심했다. 단비도 뒤돌아본다. 엄마는 바다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세 차례의 파동이 연속적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골목길에서는 한 남자가 애완견을 품에 안고 유유히 걸어간다. 매우 사랑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애완견은 치와와였다. 치와와는 매우 온순했다.
엄마는 단비를 안고 거실로 들어간다. 단비를 재우기 위해 젖을 물리고 엉덩이를 토닥거려준다. 단비가 스르르 잠이 드는 순간, 쾅! 하더니, 누군가가 담을 타고 화단으로 넘어온다. 엄마는 깜짝 놀라 마당을 바라보았다. 낡고 찢어지고 더러워진, 드레스 위에 의사가운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거실을 향해 무섭게 달려 들어온다. 저 드레스 어디서 많이 봤다…….
“누구세요!”
여자는 그대로 달려와 엄마를 꼭 안는다.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거칠게 안는다. 깜짝 놀란 어린 단비는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안, 미안. 울지 마.”
“당신 누구야! 경찰 부르기 전에 빨리 나가!”
단비의 진한 포옹에서 풀려난 엄마는 말을 더듬으며 소리친다.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어 밖을 가리킨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엄마,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단비는 벽에 걸린 엄마의 연주 사진을 보며 활짝 웃는다.
“엄마? 진짜 미친 사람 아냐?”
단비는 급히 어린단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후 말한다.
“놀라지마.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야. 자, 이걸 선물로 줄게. 잘 간직해. 이게 울리면, 네 운명은 시작되는 거야. 멋진 남자가 네 앞에 나타날 거야. 잘 잡아야 해? 알았지?”
단비는 손목의 핫브레이슬릿을 풀어 어린자신에게 채워주었다.
“이봐요! 도대체 뭐 하는 거죠?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 부르겠어!”
엄마는 급히 수화기를 집어 든다. 어린단비는 손목에 채워진 핫브레이슬릿을 보며 신기해한다. 울음을 뚝 그쳤다.
단비는 장식장 위에 거치 된 마사무네를 집어 들었다. 순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단비는 깜짝 놀란다. 엄청난 미인이 거울 안에 있었다. 엄마는 수화기를 든 채로 몸이 굳어 말을 더듬는다.
“그거 내려 놔…….”
“지금 급히 구해야 될 사람이 있어. 엄마, 돌아와서 말해줄게. 알았지?”
단비는 마사무네를 들고 마당을 훌쩍 뛰어, 대문을 빠져나간다. 엄마는 재빨리 수화기를 들어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단비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꿈에서 뛰었던 그 길이었다. 집에서 빠져 나와 오른쪽으로 두 블록 모퉁이에 위치한 집을 향해, 단비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남자의 생일축하노래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꿈에서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대문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와 대화중인 것 같았다.
단비는 조심스럽게 담을 넘었다. 담 위에 올라서서 보니, 남자는 전화통화 중이었다. 소방서로부터 연구소 폭발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남자 옆에는 구덩이가 파여 있고, 시체들이 토막 나 널려 있었다. 팔과 다리를 세어보니, 세 사람의 것이다.
단비는 가슴이 덜컥했다. 그 순간, 보았다.
무너진 파라솔 안에서부터 어린아이의 다리가 빠져나와 있었다. 단비는 담을 타고 뒤로 돌아, 주택옥상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무너진 파라솔 안이 보였다. 파라솔 안을 확인한 순간, 단비의 동공이 번쩍인다. 어린 박주용이 발가벗겨진 채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단비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 박주용의 얼굴에서 보았다. 분노의 얼굴과 전능하지만 교활한 얼굴 그리고 순수의 얼굴을…….
단비는 한숨을 돌렸다. 어쨌든 늦지 않은 것이다.
단비는 차분히 계단을 타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좌측 건물의 간판, 샵(#) 피아노학원 간판을 본다. 단비가 내려다보았던 복도 끝의 창문도 본다. 저곳에서 이곳을 보았었지. 단비는 그날을 회상한다. 갑자기 신비한 남자의 목소리도 겹쳐진다.
고백하세요,
고백이 되면 잊을 수 없겠지요.
당신은 이 세계의 모든 사념을 끊고, <세월의 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단비는 마사무네를 꼭 쥔다. 계단을 내려와 마당을 향해 난 대리석 징검다리를 밟으며 살인자 앞에 섰다. 박주용의 아버지는 뒤돌아 단비를 본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은 상태다. 모든 것이 다 날아 가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이었다. 눈으로 확인을 위해 달려가야겠지만, 벌여놓은 일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두 딸과 부인을 죽여 토막을 낸 상태다. 십이성을 투약해 화이트브레인을 키우면 모두 살아날 것이라 믿는 것이다.
“누구냐, 넌?”
단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비스듬하게 무너진 낡은 파라솔 안에서 소년을 본다.
“이제, 괜찮아.”
단비는 마사무네를 내려두고, 손을 건넸다.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단비를 올려다본다. 단비는 소년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 품에 안는다. 소년은 단비의 품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 껴안는다. 꿈에서 안았던 소녀처럼…….
단비는 박주용의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분열된 자아들의 감정까지도 모두 전해져왔다. 그래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순수의 자아>였다. 꿈에서 단비의 품에 꼭 안겨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미약한 숨결, 그것이었다.
단비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더욱 꼭 안아준다. 바로 그 때다. 허탈한 표정으로 연구소 쪽을 바라보던 박주용의 아버지 앞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의 중심에서부터 머리가 빠져나온다.
─식인귀였다.
이제는 더 이상 박주용의 식인귀가 아닌, 단비가 살던 세계의 모든 사념들을 집어삼켜 더욱 선명해지고 확실해진, 그리고 이제는 -어느새- 이 세계 사념과도 연결되어버린 <세월의 영(靈)>이었다.
단비는 그 사념의 끈에 매달려 식인귀와 함께 웜홀을 통과해 세계를 건너온 것이다. 식인귀가 블랙홀에 빠져들 때 대부분의 사념의 끈은 그 연결이 끊어졌지만, 단비와 박주용의 사념은 질기게도 끊어지지 않았다.
식인귀는 블랙홀 중심에서 웜홀을 통과하게 되었다. 웜홀을 통과한 식인귀는 화이트홀을 통과해 지금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박주용은 폭발과 함께 육체가 찢겨져, 사념만 따라왔지만 단비는 박주용이 대량으로 주입한 화이트브레인의 세포재생능력으로 인해 폭발에서도 무사할 수가 있었다.
식인귀는 곧바로 입을 크게 벌려 눈앞의 남자를 한 입에 씹어 삼켜버린다. 단비는 품안에서 소년을 떼어내며 마사무네를 집어 들었다. 무릎을 꿇고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한다.
“약속 지켜야 해? 너희들은 여기 심장이 빨간색 실로 강하게 묶여 있으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다시 만나면, 꼭 들려줘야 해. 알았지?”
소년의 맑은 눈망울이 흔들린다.
“쇼팽 말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뭔지 알지?”
뒤돌아 가운을 벗어 소년에게 입혀 준 후, 괴물을 향해 발을 박찬다.
마사무네가 뽑아져 나와 햇살을 퉁겨낸다. 단비의 몸이 떠올라 태양을 가린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단비를 보았다.
태양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와 하늘거리는 드레스의 실루엣을…….
이 세상에는 자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결코, 벨 수 없는 것들은 <세월의 영(靈)>이다.
<세월의 영>, 그것은 타파해야 할 인습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일 수도 있다. 사회의 상황과 환경이라는 마수에 저도 모르게 휩싸이는 것이며, 젊고 푸른 날의 지독한 가치관의 혼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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