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과 미스터리의 아이
정말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그 때 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나 이제 살았다는 확신이 확실히 들었다.
어떤 할머니께서 옥상으로 올라오셨는데 그 작고 연약한 몸집과 등이 약간 굽은 모습이 내 눈에는 얼마나 듬직해 보였나 안 당해본 사람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살았다 살았어.
그 할머니를 보고 용기를 내 꼬마아가씨를 다시 보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어두운 공간 뿐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감쪽 같이 사라진 게 너무 놀라워 멍하니 서있는데 할머니가 빨래 줄에서 뭘 챙겨 내려가는 걸 보고 재빨리 뒤따라 내려왔다. 그 때도 발이 안떨어지면 나는 어쩌나 그런 걱정을 했었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가 너무 듬직해 좋은데 할머니는 뭔가 나를 경계 하는 눈빛으로 자꾸 뒤돌아 보셨다.
막내누나가 담배 피우러 간 놈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내려와 귀신 봤다고 호들갑을 떠니 처음에는 안 믿다가 내가 오목조목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는 깜짝 놀라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놀라운 말을 했다.
내가 누나집에 오기 몇달 전에 이 아파트 옆 라인 베란다에서 놀다가 에어컨 실외기를 밟고 넘어가 떨어져 죽은 아이가 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데 맞아 맞아! 나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며 누나 누나 나 방금 그 얘를 본 거 같아! 그 얘 맞네 그 얘 맞아. 그 얘야 그 얘.
누나도 너무 놀라 사색이 되어서는 겁에 질려 우는데 나도 진짜 눈물이 저절로 나왔고 누나처럼 펑펑 울고 싶은데 남자니까 질질 짜기만 했다.
다음 날 학원에 가서 원장샘에게 어제 겪은 일이라며 수업 들어가기 전에 진지하게 말했는데 옆에 B반 선생님에게 선생님 우리 아파트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하고 묻는다. B반 선생님도 금시초문이란다. 처음 듣는데요? 이러면서.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난 복학을 했고 취업 준비로 정신없이 살다보니 피아노와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항상 난 피아노를 포기한 게 아니야. 우선순위에서 잠시 밀려난 것뿐이라며 언제든 다시 배우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고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갔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크고.
정말 집사람 말따라 거시기 두쪽이랑 내 척추 하나만 믿고 의지하며 아파트를 장만하고 오손도손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 나가는데 어느 날 문득 뭔가 공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단지 안 상가 피아노학원 간판을 보았고 나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갔다.
문 바로 앞에 피아노 한대와 원장샘이 앉아 있어서 안녕하세요. 저기 등록을 하려는데…
자녀분이요? 아? 아버님이요?
네.
어쩌나 저희 성인부는… 따로 받지를 않아서요. 동네 아이들 상대로만 가르치다 보니…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근데 아버님 피아노 치셨어요? 처음인가요? 물으시니까 당당하게 네 군대 제대하고 6개월이요. 체르니 100중간?
네? 6개월에 체르니 100 중간이요?
네 소나티네는 거의 쳤습니다.
와우. 한번 쳐보실래요?
선생님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근데 피아노학원 원장샘은 왜 다들 이렇게 예쁜 걸까.
네 하고 의자에 앉아 건반 위로 열손가락을 올렸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샘이 웃고 나도 웃고.
등록을 하고 다시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하니까 즐겨 쳤던 곡들이 신기하게 다시 연주되었다.
와. 정말이네요? 6개월이 아닌데? 이러시면서 여기 원장샘도 그 때 그 원장샘처럼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내 눈앞에 나타났냐고 너무 반갑고 기특하고 좋다고 집에 피아노 있냐, 없냐. 없으면 키 하나 줄 테니까 토일 맘껏 와서 쳐라.
그래서 다시 미친 듯이 피아노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그 귀신을 다시 본 건 체르니 50을 들어가 그전 원장샘이 했던 말 벽을 넘는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했던 말이 뭔지 이해할 때였다.
갈수록 묘기와도 같은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데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건반을 정확히 때리지 못하니 이 때 이미 시작된 미스로 인해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짜증을 유발하고 의욕을 꺾기 시작했다. 체르니50. 이 단계를 넘어선다는 건 손가락이 이미 굳어 있어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짜 한계였다. 그래도 창의적인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보자며 그 날도 일요일에 나홀로 학원에서 연습실로 들어가지 않고 원장샘 피아노를 상대로 다른 건 포기해도 즉흥환상곡은 반드시 나만의 곡으로 완성하겠노라 이를 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아노를 치고 있는 그때였다.
내 뒤로 뭔가가 스르르 지나갔다.
내가 주말에 홀로 피아노를 치면 원생들이 지나가다가 소리를 듣고 누구야? 하며 문을 열기도 했었다. 그러다 내가 있으니 저 아저씨네 하며 바로 문 닫곤 했는데.
그러면 문에 걸린 풍경이 울렸다. 근데 그 날은 풍경이 울린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가 너무 몰두해서 풍경소리를 지나쳤나? 누가 들어왔지? 하며 계속 곡을 파고 있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며칠 전에 선생님이 자기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 볼펜이나 잡다한 물건들 담아두는 바구니에 둔 차키가 없어졌단다. 그래서 집에도 못가고 샘 남편 분께서 집에 있는 키를 가져와 늦게 퇴근했다고. 그 잃어버린 키에 매달린 지갑이랑 통채로 사라졌는데 그게 또 명품이란다. 남편분이 정말 큰 맘먹고 사준 거라고.
샘은 심증이 가는 학생이 있지만 물증이 없으니 그냥 어디서 잃어버린 걸로 체념했단다. 동네에서 민감한 일이라 스스로 참고 삭힌 것이다.
수업 중에 일어난 일이고 누군지 알 것도 같다고.
그 아이요? 진짜 그 얘가 가져갔을까요? 글쎄요 저는 뭐라고 말씀을 못드리겠어요.
그냥 아버님만 알고 계세요.
난 그래서 그 의심의 아이가 들어온 줄 알고 -다른 아이들은 나를 보고 전혀 들어올 생각없이 그냥 문을 닫는데- 그 의심의 아이가 내가 몰두해 있을 때 들어온 걸로 생각해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또 뭐 없어지면 나도 휴일 연습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를 찾아 보는데…
하얀 잠옷 끝자락이 연습실 방 하나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네?
뭐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지고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데 그 때 그 충격으로 인한 장애처럼 힘을 하나도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이제는 한 집안의 가장이고 아이를 키우는 아버진데 바보처럼 이러고만 있으면 안된다며 의자에서 일어나 그 연습실로 이동했다.
문이 닫혀 있어 더 무서웠고 사각으로 뚫려 있는 곳을 통해 안을 살짝 들여다 보는데 피아노만 보였다. 그래도 문을 열고 확인하자 그러면서 문을 확 열었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하며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누가 내가 방금전까지 앉아 있었던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년 되었을까?
정말 그 때랑 똑같이 무서웠지만 그만큼 반가움도 컸다.
다시 만난다면 말을 꼭 걸어보고 싶었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 사건에 인류 최초로 귀신과의 대화라는 첫 사례를 남길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의 순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정말 큰 용기를 내어 한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하얀 잠옷 차림의 꼬마아가씨는 여전히 그 겉피없는 하얀 속베개를 분명 오른쪽에 안고 있었고 왼손을 건반 위에 올린 상태였다.
야 하고 부르고 싶은데 생각 대로 안되었다.
저 귀신이 돌아보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풍경이 울렸다.
문이 살짝 열렸고 누군가가 얼굴을 쏙 내밀더니 안을 슥 들여다 보았다. 그 의심의 아이였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다시 의자에 앉아 있을 귀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는데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의심의 아이가 아저씨! 하면서 달려와 나에게 꼭 안기네?
이거 뭐지?
하면서 아이를 떼어놓고 너 방금 여기에 뭐 봤어?
하고 물으니까 아니요? 하고는 웃으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저 얘 뭐야? 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무서워서 부랴부랴 도망치듯 학원 문을 잠그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숨을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호흡이 뻥 터졌고 정말 살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원장샘에게 끝내 하지 못했다.
그 의심의 아이도 걸렸고 여러모로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냥 집사람에게만 말했다.
그 뒤로 아내를 졸라 중고 피아노를 장만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학원은 원생이 줄줄 나가 떨어져 원장샘은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내가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서 다 나 때문인 거 같다고 어린 애들만 있는데 시커먼 놈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토일 가리지 않고 피아노를 쳐대니 부모들 사이에서 좋은 소리 안나오는 것 같다고 하니 원장샘은 끝까지 아니라고 오히려 미안해 하셨다.
그 의심의 아이가 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달려와 와락 안겼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뭔가 찔렸거나 내가 본 귀신을 똑같이 보아서 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본다.
하지만 둘 다 아니길 바란다. 난 그 의심의 아이를 의심해선 안 되고 내가 본 것을 그 아이는 안보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피아노를 도저히 포기 못하겠다고 하니 집사람은 선생님을 구해 집에서 레슨을 시켜주었다. 엄청난 배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체르니 50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난 귀신을 두 번이나 코앞에서 본 이 사건이 내가 살아오며 겪은 일 중에서도 굉장히 큰 사건에 해당하기에 이해해 보려고 나름의 연구와 공부를 해왔는데 가장 접근할 수 있는 게 칼융의 집단 무의식이다.
아마 나의 무의식과 그 꼬마아가씨의 무의식이 피아노를 매개체로 삼아 집단무의식으로 연결되어 만나는 과정에서 특정한 무의식의 무형상이 의식처럼 수면 위로 올라와 유형의 형체를 만든 게 아닐까.
이것도 사실 말이 안되지만 다른 건 더 말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