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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숏츠

작가의 각오

소설이든 에세이든

by 임경주


둘 다 창작이다.

허구와 일상을 다루는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한다.


특히 철학자의 사상은 창작의 가장 큰 도구로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그의 사상 밑에서 찬양하듯 올려다보며 영향력 아래에 머물고 있는 모양새라면 작가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한 때 그 놀라운 사유의 향연이 기적과도 같은 구원의 손길이었고 답답한 가슴에 화려한 불꽃놀이로 터져 올라 눈물을 쏟아내게 했을지언정, 그의 철학이 그대의 지나온 세월 그대의 힘든 삶, 그대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아픔을 위로해주고 치유해주었다 한들 작가라면 발아래 두어야 한다.


깊고 힘든 수렁에 빠져 있던 당신을 기적처럼 건져 올려 주었고 그 말씀만으로도, 보고 또 보아도 좋은 문장 하나 만으로도 남은 인생 얼마든지 행복하고 풍요로울지 모르겠지만 그건 작가가 아닐 때 그렇게 하라.

적어도 나는 작가라면 그러면 안 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은 니체, 칸트, 예수, 부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세상을 분명 이롭게 할 목적으로 남긴 말들은 그저 작가의 창작을 돕고 보조하는 도구이자 당신의 뇌를 돌고 돌아 손 끝에서 재활되는 재료일 뿐이다. 그들을 숭배하지 마라. 그림자에

머물러선 안된다.


이를테면 집을 짓는 목수의 망치와 못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사랑으로 가득 찬 축복의 삶을 실천하고 살았다고 한들, 당신이 만들어 나가는 신세계의 도구와 재료 그 이상의 가치를 두어서도 안 되고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 된다. 내가 어떻게 감히, 나 따위가 뭐라고 그들의 말을 함부로. 그들의 선행을 함부로.

이런 마인드는 글을 쓰지 않을 때 해야 맞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세상의 창조자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서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고 때론 비웃고 때론 감사하고 분노하며 도구와 재료들을 아우르고 있는지, 작가는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 이때 필요한 건 공감능력보다 가늠의 능력이다.


나를 임종 직전까지도 미워했던 아버지도 내 창작의 도구이고 사랑은 뭐 그리 거창한 게 아닌 그저 삶의 태도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엄마의 사랑도 작가인 나에게는 글을 계속 쓰게 만드는 힘이며 꺼지지 않는 엔진이자 동시에 창작의 도구이고 재료로 기능한다. 그건 내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환원의 과정이다.


뛰어난 공감능력은 글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정작 필요한 건 가늠의 능력이다. 내 글쓰기는 오직 나만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신이다.


정작 현실은 한반도를 단 한 번도 벗어나 보지 못했어도 작가는 세상을 손바닥 보듯 한눈으로 내려다보고 우주 이까짓 것도 마음만 먹으면 한 손으로 요리해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야 한다.


예술은 다 사기다.

특히 글쓰기는 정교한 장치와 정확한 계산으로 읽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들고 영업사원의 꽃이라 불리는 클로징, 지갑을 열게 만드는 고도의 사기 아닌 사기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 설득의 기술은 절대로 기망의 죄가 입증되거나 성립자체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원래부터가 거절당하는 직업이다.

저 과정이 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바뀌지가 않기에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글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큰일이 일어난 것이고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독자가 단 한 명만 남을지라도 자기만의 콘셉트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끌어올려야 한다. 쓰고 또 써야 한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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