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대사 치기 연습, 그냥 훈련
오빠 안녕?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머릿속이 좀 복잡했는데
가벼운 인사로 시작하니까 뭔가 개운하고
첫 인사치곤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잘 지내고 있지?
나도 물론 잘 지내고 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해가 빛나
하늘을 보면 구름 한 점 찾아볼 수가 없는 게
참 신기해
여기 생활 적응하는 것도 어느 정도 끝난 거 같아
일 배우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집에 돌아오면 지쳐 쓰러져 잠들었는데
지금은 말똥말똥 눈 뜨고
오빠에게 편지를 쓰고 있잖아?
이삿짐은 아직 다 정리 못했어
오빠 물건도 있고 해서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문단속을 다시 할까 말까
갑자기 머리가 또 복잡해지네
근데 이제 생각 안 하려고
난 아무튼 잘 지내고 있어
첫 월급 타면 엄마아빠 선물로
겨울내의를 사드릴까 해
적금통장도 만들고
집에 와보고 싶다는 회사동료들 초대해서
삼겹살 파티도 하고
너무 정신없이 지내느라
잠들어도 꿈 한 번 꾸지 않았는데
오늘 밤은 무서운 꿈을 꿀 거 같아
빈 종이를 몇 번 접고 가만히 생각 중이야
뭐가 만들어질까
그냥 내 마음속 응어리
접은 종이 안에 담아 두려고
감기 조심하구
아프지 말고 잘 지내
나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천안 가게 되면 미리 말할 게
그때 보자
너무 맑은 밤
사랑을 전하며 이만 맺을 게
안녕
하루 종일 비가 올 듯 말 듯해
해가 뜨던지
아니면 차라리 시원하게 내려 주던지 했으면 좋겠어
잘 지내고 있다니 참 다행이야
네 편지 형식이 녀석에게 보여줬어
나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 녀석 나만 나쁜 놈이래
너 이런 편지 받고도 헤어지면 진짜 나쁜 놈이라고 그러네
그래 알아
부족한 나에게 정말 잘해준 거 알아
난 그만큼 못해준 게 사실이고
그런 생각을 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네 편지 읽고 한동안 먹먹했어
차라리 욕을 하지 그랬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따지지 그랬어
그래 만나는 사람 있어
우리 서로에게 모진 말하고 함부로 상처 줄 때
그래도 이별은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을 때
그땐 분명 없었던 사람이야
안 믿겠지
사실 네가 자꾸 생각나
이런 말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천안 올 때 연락할 필요는 없어
내 짐은 다 버려도 돼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하겠어
고마웠다는 말만 남길 게
잘 지내
아프지 말고
그럼 안녕
남자의 이름은 민우라고 하고, 여자는 소율이라고 하자.
민우는 답장을 통해 작별을 고했지만 사실은 소율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의 6년 만남부터 최근 헤어짐까지, 민우 옆에는 항상 친구 형식이 있었다.
형식은 두 사람의 문제에 끼고 싶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소율의 편지를 보게 되었다.
민우는 이미 정리했고 헤어졌다고 선언하지만 형식을 통해 소율의 마음을 알고 싶다.
술자리에서 말없이 술만 마셔대니 형식이 확인 들어온다.
소율이에게 전화해 보겠다고.
하지 마 새끼야.
네가 왜 나서냐고, 까지는 말 못 한다.
너 정리한 거 맞아?
몇 번을 말해? 끝났다니까?
내가 보기엔 너 아직 아닌 거 같고 소율이도 아닌 거 같아. 안 되겠다. 내가 옆에서 너네들 지켜보다 앓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형식이 민우가 보는 앞에서 소율이게 전화를 건다. 민우는 미친놈 하면서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율의 목소리는 밝다.
아 참 오빠. 나 이번 주 선본다? 엄마가 자꾸 만나나 보라고 해서.
아 그래? 음… 암튼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네.
잘 지내야지. 오빠도 잘 지내. 전화 줘서 고마워.
형식이 전화를 끊고는 나가자고 그런다. 담배 피우자고.
소율이 이번 주 선 본대. 너 한마디도 안 물어보는데?
민우가 안주도 없이 소주만 마셔댄다. 다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야 솔직히 말해봐. 너 소율이 아직 못 잊었지?
아니라니까?
아니긴 개뿔.
아니야.
아 근데 왜 자꾸 병신 같이 굴어?
뭐가 또 병신이냐?
병신 같잖아.
그만하자.
민우가 소주를 연거푸 들이켜다가 솔직히 털어놓는다.
사실 잘 모르겠어. 아직도 좋아하는 건지…. 예전처럼 매달려 주길 바라는 건지…
너 소율이 선보는 거 싫지? 이것부터 확실하게 말해봐.
응. 싫어.
엄청 싫어?
어. 엄청 싫어.
그러면 아직 좋아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 건 맞네. 야 근데 있잖아, 사람이 진짜 좋아하면 내 눈 하나 파줘도 안 아까워. 그 정도 아니면 소율이 막지 마. 너 그 정도 돼?
응.
그니까 막지… 뭐라고?
안 아까워. 내 눈하나쯤.
진짜야?
응.
야야. 그러면 한쪽 눈 말고… 음, 너 소율이 팔 하나 아니 다리 하나 위해서 니 목숨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
응.
형식이가 말문이 막혔나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런 미친 새끼… 너 그러면 그동안 왜 그런 건데?
아 몰라. 그냥 싸운 거지.
야 빨리 내려가.
어딜?
부산 가라고 병신아. 지금 나랑 술 마실 때야? 가서 잡아. 선보기 전에 다시 잡아야 할 거 아니야.
어. 나 갈게.
부산역 광장.
소율이 민우의 전화를 받고 마중은 나왔다. 하지만 예전의 소율이 아니다. 전혀 남이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나 약속 있어서 가봐야 해.
선 본다며.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니 왜 말을.
뭐가?
아니 반말을 할 거면 앞에 오빠를 붙이던지, 안 붙일 거면 높임말을 써야지… 요.
소율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노려본다. 민우의 착각일 수도 있다. 웃을랑 말랑. 하지만 급 정색하고는 딱 부러진 표정으로 말한다.
네. 제가 선을 보든 말든 그쪽이랑은 아무 상관없으니까요. 신경 끊으시죠?
그게 말처럼 쉽게 끊어지나.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니 선본다며…
그게 댁이랑 뭔 상관이냐고요.
나는 선 같은 거 안보잖아.
아 보세요. 누가 말렸어요? 실컷 보세요.
왜 그렇게 화를 내?
오빠가 지금 화나게 하고 있잖아? 영숙이 언니 만난 담서! 하, 진짜…
에이 씨. 아니야!
웃기고 있네.
진짜 아니라니까?
집에 와서 자고 갔다며. 누가 모를 줄 알아?
형식이가 그래?
그래.
네가 추궁하니까 말했나 보네.
나 정신 차리라고 말해준 거겠지. 할 말 다했으면 가.
아직 안 했는데.
난 더 들을 말 없어. 가.
영숙이랑 진짜 아니다.
아, 듣기 싫다고! 아니든 말든!
그때 집에서 다 같이 놀다가 잤어. 말자도. 아무 일도 없었고.
말자 언니도? 헐.
그냥 놀다가 늦어서 저기 여기 서로 떨어져 잔 거야. 형식이도 같이 있었고. 진짜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 말은 안 해?
됐어. 됐고. 가. 나 더 이상 할 말 없어.
진짜라니까?
입만 열면 거짓말.
뭐?
거짓말 그만해. 아침에 다들 가고 오빠랑 영숙이언니랑 둘만 남아 있었다며.
다 아네?
그래 다 알아!
아 이 새끼는 도대체 뭔 입이 이렇게 싼 거야.
그래, 내가 형식이 오빠 추궁했어! 그래서 안 거야. 그 뒤로 나 밀어내기 시작한 것까지도!
아니야.
그만해.
진짜 아니라니까? 영숙이는 나 하나도 안 좋아해.
그럼 오빠는 좋아하고?
….
내가 대답을 못하니 소율이 울먹인다.
나는 정말 괘씸한 게… 오빠 대학 간 뒤로 나랑 소원해진 거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어. 근데 우리 집은 등록금 낼 돈도 없고 나는 오빠보다 더 좋은 학교 입학하고도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데… 내가 없는 그 집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용납이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미안해.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야? 나 밀어내는 거 뻔히 알면서도 편지 썼어. 헤어지기 싫어서. 그때만 해도 그랬어. 근데 오빠는…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우리 끝났잖아. 그러니까 가.
너도 사람 힘들 게 한 건 인정해라.
그래 잘됐네. 이제 힘들 게 할 일 없으니까요, 가세요.
소율이 찬바람을 일으키고 돌아선다.
민우가 뒤를 따라간다. 소율이 멈추어 서더니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이별예감 Part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