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홍화 20화

홍화 #17

결국엔

by 임경주

혼멸검을 쥔 도윤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500년 내단이 불꽃처럼 그의 몸을 태워 신선의 힘을 버텨내고 있다. 굉장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부용의 간절한 눈빛 앞이라서 더욱 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베려 했으나, 결국 베지 못했다.

“도련님. 어서요! 베셔야 해요.”

부용의 예쁜 얼굴이 피눈물을 흘리듯 일그러졌다. 도윤은 할 수 없었다. 홍화의 500년 내단으로도, 혼멸검의 무시무시한 힘으로도 차마 벨 수가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윤의 마음속 깊숙이 뿌리내린 인륜(人倫)과 연민(憐憫)으로 인해 베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도윤에게 부용은 동사십낭의 괴물이 아니었다. 홍화와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하는 순수 그 자체였다. 그 순수를 베는 행위는, 영웅의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배신으로 느껴졌다.

홍화가 뒤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롭다. 절박하다.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도령! 빨리 베시오! 망설일 시간이 없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칠악맹주 우냉선!”

부용의 얼굴이 다시 동사십낭의 얼굴로 바뀌는 순간, 동사십낭이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도윤의 뒤로 섬뜩한 한기(寒氣)가 생겨났다. 그 한기는 도윤의 타오르는 불꽃을 꺼트리고도 남았다. 저 멀리 에메랄드빛 바다 수평선까지 얼어붙는 듯한 냉혹한 기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신조의 불꽃날개 짓까지도 움츠러들게 만드는 순수한 악의 그림자가 무간실(無間室) 결계 내부를 휘감았다.

“존명.”

도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기운은 방금 전 동사십낭이 내뿜던 뱀의 독기나 괴물의 힘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상의 모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절대고수의 냉정한 살기(殺氣)였다.

“우스운 꼴이로다.”

짧고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도윤의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마치 온몸의 신경망이 일시에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감각. 손발의 마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자체가 뒤틀려 도윤과 동사십낭 사이의 거리가 무한대로 벌어지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임경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장르작가 임경주입니다. 반갑습니다. 장르소설도 사랑해 주세요. 네? 아 저 infj입니다.

17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7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0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