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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곰이 나를 쫓아오는 날

글이 죽어라 안 써지는 날엔

by 임경주

글이 안 써지면 걱정부터 앞선다.

늘 내 뒤를 추격해오던 큰 곰이 이 때다 싶어 곧 덮칠 것만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PC를 항상 켜두는데 오늘은 전원버튼을 누르기는커녕, 시골 김장 때 챙겨간 PC 그대로 마우스도 뽑아져서 따로 놀고 있고 그냥 멍하니 앉아서 몇 시간째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다. 책도 안 읽어진다. 이러다 발동이 걸리겠지, 하며 때를 기다려보지만 여전히 PC앞에 앉기가 두렵고 겁난다. 당장 앞도 겁나지만 뒤는 더 무섭다.


내 아들은 공부를 어떻게 했나 모르겠다. 아들이지만 존경스럽다.

아들이 치열하게 공부했던 데스크톱이 있는 공부방에는 얼씬거리고 싶지도 않다. 집사람은 거기 쪼그려 앉아 글 쓰지 말고 아들 방에 들어가서 쓰라고 하는데 내 맘을 정말 모른다.


단 몇 분의 시간이라도 시간을 허투루 쓴 적이 거의 없어서 벽시계를 살짝 보니, 아이고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도 허무할까. 진짜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브런치의 모 작가님께서 성실과 다정함 그리고 강인함을 얘기하신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난 분명 성실하다. 하지만 내 스스로 성실한 게 아니라 뒤에서 큰 곰이 항상 쫓아오고 있으니 도망치며 살다보니 그게 성실로 이어진 것 같다. 그렇다고 곰에 쫓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왜 이렇게 거대한 압력으로부터 도망치듯 내 나름의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글 안 써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진짜다.

오늘은 정말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시간이 괴로우면서도 뉴스도 챙겨보고 있고 그저 멍하니 핸드폰 틱톡도 쓱쓱 긁어 올려보다가 간혹 오는 톡에 반가워 답변을 하고 있는데 이런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뭔가 짠하기도 하다.


아무리 야매글쟁이라고 해도 20년을 넘게 글을 썼으면 발동이 걸리기까지 이제는 좀 그 시간이 줄어들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여전히 컴퓨터 앞이 두렵고 또 뒤에서 쫓아오는 곰이 더 무서운 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한번 씩 이런 날이 찾아온다.

이럴 때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난다.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건 그래도 나에게 장르 글쓰기를 알려준 혹독한 스승이자 좋은 동생이자 술친구인 박 모 작가다. 근데 이 친구 요즘 너무 바빠서 선뜻 연락하기가 그렇다.

그 다음으로는 여기에서 언급하기 좀 그렇지만 보고 싶은 얼굴들이 몇몇 있다. 솔직히 많이 보고 싶다. 연락하고 지금 올라가요! 하면 분명 반가워해줄 것을 알지만 그들만의 정해진 생활이 있으니까 그걸 깨고 만나달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참 나도 외로운 사람이구나 싶지만 그래도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모 작가님께서 술 좀 그만 마시라며 우엉차를 선물해주셔서 요즘은 술 대신 우엉차를 챙겨 마시고 있다. 그런다고 꾸준히 마시던 술을 덜 마시는 건 아니지만, 그래 술 좀 그만 좀 먹자 하며 생각은 조금씩 변해가는 게 중요한 거 같다.


글을 쓰면 그 글 속에 뭔가 의미를 담기 위해 구성을 하고 나름 복잡한 계산에 들어가고 그랬었는데 요즘은 그냥 정말 힘 빼고 막 써나가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일상의 언어로 소소한 이야기를 해나가고 싶다.


설거지를 하면서 건조대에 큰 접시는 뒤로 가게 놓고 작은 접시들을 앞으로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든 다시 그 위치를 바꾸어 놓는 그런 심정으로 글을 쓰고는 있었지만, 요즘은 그 생각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솔직하게 쓰면 그 진심이 통하고 공감될 것인데.


오늘 당장 글을 한 줄도 못 쓰고 방황하면 다음 날이 무척 걱정된다.

내일도 이러면 어떡하나. 이런 걱정 때문인데, 그래도 내일은 내일이니까 아무래도 내일은 뭔가 또 다른 내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니까.

그 내일에 희망을 걸어본다. 이왕 글 한 줄 못 쓰고 쉬는 거 좀 편하게 쉬어보자.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살짝 뒤를 돌아볼까? 어린 아이도 아니고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 뭐가 무서워? 어디, 돌아보자. 곰이 있나?

아이고, 저놈의 곰.

언제든 덮칠 것 같아 무섭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훗날 예쁜 아이에게 할아버지가 그 때는 이랬어, 그 때 좀 힘들었고 참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래도 나름 잘 이겨낸 것 같아.

그래서 할아버지가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 같아. 어디 보자, 이제는 그 곰이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없네?


그런 말을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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