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권력, 통제와 해방 그리고 복수
팬텀.
염보경은 패션계의 전설이었다. 그의 이름이 붙은 컬렉션은 곧 권력이었고, 런웨이는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신화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불렀고, 일부는 그를 두려워했다. 완벽을 향한 그의 집착은 주변을 질식시켰고, 그 뒤에는 언제나 충성스러운 열한 명의 보조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규율 아래 서로를 감시하며, 염보경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갈아 넣었다.
정채연은 그림자였다. 낮에는 강남의 작은 작업실에서 ‘팬텀’의 실루엣을 그대로 재현하는 위조 장인으로 일했고, 밤에는 진짜의 결을 연구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모방의 기술뿐 아니라 관찰자의 예리함과 복수의 설계가 숨겨져 있었다. 입사 면접에서 무시당한 기억은 오래전의 상처로 남아 있었고, 그 상처는 그녀의 계획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강남의 유명 백화점에서 한 고객의 신고로 시작된 소동은 곧 팬텀의 내부를 흔들었다. 위조품들 사이에서 발견된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붉은 실, 염보경을 향한 찬사의 문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염보경은 범인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수사망은 곧 정채연을 향했고, 단 보름만에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 당한다.
서울구치소.
그런 그녀의 앞에 염보경이 나타났다.
염보경이 정채연을 위아래로 훑어 본다. 굉장히 기분 나쁜 눈이었다. 음흉하고 더럽다. 정채연은 마치 벌거버겨진 기분이었다.
법적처벌과 민사형사 모든 손해배상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는 그가 마련한 ‘특혜’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비밀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염보경은 다정하고 세심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는 ‘뮤즈’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고, 정채연은 그 호칭을 무기로 삼아 그의 신뢰를 얻었다.
그의 아틀리에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었다. 벽에는 스케치와 패턴, 수많은 샘플이 질서정연하게 걸려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과 정밀한 치수 측정 장비가 놓여 있었다. 염보경은 정채연의 손을 잡고 말없이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프로페셔널했고, 그가 남긴 말들은 모두 예술적 이유로 포장되었다.
“완벽한 핏을 위해선 모든 습관을 알아야 해. 걸음걸이, 앉는 방식, 잠들 때의 자세까지.”
그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채연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그는 그것을 ‘데이터’라 불렀고, 정채연은 그것을 자신의 무기처럼 받아 적었다.
그의 통제는 서서히, 그러나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아침에는 그가 고른 옷을 입고, 낮에는 그가 지정한 색감의 음식을 먹고, 밤에는 그가 고른 음악을 들으며 잠들었다. 모든 것이 ‘창작의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염보경은 정채연에게 매일 새로운 샘플을 입혀보고, 솔기와 재봉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감탄을 표했다. 그의 감탄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 말들 사이사이에는 규범과 기대가 스며들어 있었다.
“뒤로 돌아. 이 부분을 이렇게 하면 네 움직임이 더 아름답게 보일 거야.”
허리를 감싸고 들어오는 남자의 손이 어쩜 저리 예쁠 수가 있을까. 채연은 아찔하다. 정신줄을 붙잡아야 한다.
“최상급 실크야. 이 재질을 좋아하게 될 거야. 속에 아무 것도 걸치지 말고 입고 나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움은 점점 더 큰 요구로 바뀌었다.
정채연은 그 요구들을 모두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용해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염보경의 ‘예술적 실험’은 외부에선 매혹적인 이야기로 포장될 수 있었다. 언론은 ‘천재와 도둑으로 만난 인연 이제는 뮤즈의 은밀한 협업’이라 부를 법한 장면을 상상할 것이고, 투자자들은 독점적 영감의 전유물이라 여길 것이었다. 정채연은 그 포장을 역이용했다. 그녀는 붉은 실의 흔적을 따라 일부러 더 눈에 띄는 단서를 남겼고, 염보경이 자신을 ‘뮤즈’로서 전시하려 할 때마다 그 장면을 내부 증거로 바꿔놓았다.
그가 치밀하게 쌓아 올린 통제의 구조는 결국 균열을 드러냈다. 정채연은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작은 조작을 심어 공급망의 불일치를 만들어냈고, 디자인 노트의 일부를 위조해 내부 이메일을 조작했다. 팬텀의 가치가 흔들리자 언론은 의혹을 증폭시켰고, 보조 디자이너들 사이의 불신은 폭발했다. 염보경은 자신이 만든 ‘예술적 신화’가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더 이상 다정한 멘토가 아니었다. 그의 친절은 통제였고, 그의 통제는 무너질 때 비로소 진짜 모습으로 드러났다.
정채연은 승리의 순간에도 웃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자들이 남긴 상처를 드러내고,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부조리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붉은 실은 이제 더 이상 찬사의 표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고, 기억이었다.
검은 뿔테 안경에 가려진 주근깨 가득한 얼굴,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비쩍 마른 그녀, 채연이 면접실에 들어와 앉지도 못하고 서 있을 때였다.
“기술은 좋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태도가 더 중요하다. 우리와 함께할 사람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다. 브랜드의 철학을 이해하고, 그 철학을 몸으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해.”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요구와 위계가 분명히 섞여 있었다.
11인의 보조 디자이너들이 염보경의 말에 찬양하며 설명을 덧붙인다. 그녀를 비웃는다.
정채연은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그러나 염보경은 면접의 끝에서 한마디를 더 던졌다.
“우리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원한다. 네가 그럴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시험이었고, 정채연은 그 시험에서 ‘아직’ 합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비가 그친 거리에서 정채연은 포트폴리오를 펼쳐 다시 보았다. 그의 말들은 상처가 되었고, 그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문장은 그녀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남겼다.
—그것은 복수의 설계도가 될 불씨였다. 그녀는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오히려 기름을 부어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욕을 기억으로, 기억을 전략으로 바꾸는 냉정한 계산이었다. 정채연은 그날 이후로 자신의 기술을 더 날카롭게 갈았고, 그의 세계를 더 깊이 관찰했다. 면접실에서 받은 한마디가 결국 그녀를 움직이는 중심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축은 나중에 붉은 실로 연결되어 염보경의 신화를 끊어 놓을 줄 알았다.
남을 쉽게 보는 것들은 찬양에 약한 법.
복수에 성공한 채연이 염보경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이미 폐쇄된 공간은 먼지와 침묵으로 가득했다. 거울은 깨져 있었고, 벽에 걸린 스케치들은 반쯤 찢겨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비밀의 문을 열고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 그가 마지막으로 입혀주었던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안감의 솔기를 따라가며 손끝으로 붉은 실을 느꼈다. 그 실은 여전히 단단하게 박혀 있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가위로 실을 하나하나 잘라냈다. 마치 과거의 족쇄를 끊어내듯. 마지막 실이 끊기는 순간, 그녀는 드레스를 접어 천천히 불 속에 넣었다. 천이 타들어가며 퍼지는 냄새는 오래된 집착의 잔향 같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희미해졌고, 하늘은 서서히 푸르게 물들고 있었다. 정채연은 주머니에서 작은 붉은 실 한 가닥을 꺼내 손가락에 감았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서명이 아니라, 그녀가 선택한 서사였다.
“이제, 내 이름으로 짓는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불타는 아틀리에의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오래된 권력의 잔해가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염보경은 폐허가 된 런웨이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한때 그의 이름이 반짝이던 조명은 꺼졌고, 관객석의 의자들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 손에 쥔 마지막 샘플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것들이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불렀다. 그 칭호는 이제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규칙들, 완벽을 향한 집착, 그리고 그 집착을 정당화하던 말들까지.
—모두가 자신을 가두는 사슬이 되었음을 알았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이 예술이었겠지만, 그 예술은 결국 사람을 소모시키는 기계였다.
그는 정채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단지 도둑년에 불과했지만 한 명의 재능 있는 장인이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뮤즈라 불릴 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그 친절과 칭찬으로 포장된 요구들이 어떻게 그녀를 옭아맸는지, 그리고 그 옭임이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실마리가 되었는지를 그는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은 쓰라렸고, 쓰라림은 곧 고독으로 이어졌다.
“그래, 나는 예술을 만들었다고 믿었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공허했고, 그 말은 자신을 위로하려는 시도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말 끝에는 변명이 섞여 있었다.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결과뿐이었다. 깨진 거울, 찢긴 스케치, 그리고 불타 사라진 아틀리에의 연기와 더 이상은 내 소유물이 아닌 그녀….
염보경은 천천히 주머니에서 작은 붉은 실 조각을 꺼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익숙했고, 그 실은 한때 그가 사랑이라 부르던 집착의 잔재였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가락 사이로 놓아 흘려보냈다. 실은 바닥에 떨어져 조용히 풀려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이 만든 서사가 스스로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무대 위의 신이 아니었다. 무대는 그를 버렸고, 관객은 떠났다. 남은 것은 자신과, 자신이 남긴 상처들뿐이었다. 염보경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만든 규칙들 앞에서 작아진 자신을 마주했다.
“예술은 사람을 살리는가, 아니면 죽이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은, 그가 평생 피하려 했던 진실이었다.
새벽빛이 천천히 무대 위로 스며들었다. 염보경은 그 빛 속에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느렸고, 그 느림은 이제 남은 것들을 돌아보려는 의지였다. 뒤에 남겨진 것은 파편뿐이었지만, 그 파편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하얗고 매끈한 여자의 발 끝, 개목걸이를 착용한 염보경이 바닥에 엎드려 개 사료를 먹고 있다. 흰 발가락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보경이 고개를 들어 올리면 채연의 스케치가 보인다.
보경의 스타일을 완전히 벗어난 소박한 드레스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