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죽기 전에 오로라
30대 후반,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에 내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주제도 모르고 까불던 시절, 아마도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내가 뭔가 특별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제에 도전했지만 매해 순문학의 문턱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그때 만난 작품이 바로 여우의 빛이었다. 한 문장, 한 이미지가 내 모든 자만을 무너뜨렸다. 오로라를 금붕어의 비늘로 옮겨놓은 그 치환은 거대한 자연현상을 일상 속의 작은 존재로 환원시키며 내게 경이로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남겼다.
거대한 자연현상을 작고 연약한 존재로 옮겨온 것은, 결국 우리의 초라한 일상도 어느 순간엔 오로라처럼 빛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한, 부족한 내 해석일지도 모른다.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되나요?
한 장면에서 오로라가 언급될 때면, 잊고 있던 감정이 다시 떠오른다. 드라마 속 남녀가 함께 오로라를 보는 장면을 보다가 문득, 그 작가가 오로라를 직접 보았는지, 초고를 어떤 이성으로 다듬었는지 궁금해졌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다시 작품을 읽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여전히 발전하지 못한 나 자신을 마주할까 두려워 아직도 손이 가지 않는다.
그쪽 신화에서는 오로라를 여우가 설산을 달릴 때 꼬리가 바위에 부딪혀 일어나는 불꽃이라고 한다.
여우의 빛을 접한 뒤 나는 순문학을 접고 장르소설에만 매진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작품이 내게 남긴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오로라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 하늘에 펼쳐진 신비한 빛의 색이 오래된 좌절을 잠시 녹여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 그녀가 좋아한다던 수족관의 금붕어 무늬는 오로라를 닮았다. 비늘의 불규칙한 빛과 흐름이 하늘의 빛결을 닮아, 작고 연약한 존재가 거대한 풍경을 닮아가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목덜미에 새겨져 있다는 금붕어 타투도 어쩌면 같은 빛의 변주일 것이다.
오로라를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주인공은 마지막에 그만의 오로라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만의 오로라는 어디에 있을까.
내 주변의 오로라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지금 떠오른 이 생각이 맞다면, 몹시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