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의 추억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져다주신 누런 도화지 뭉치가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귀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아내가 가져온 파손된 A3 용지에서 그때의 설렘을 다시 느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끔 마음껏 써도 되는 상상의 것들이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한데 다시금 종이 부자가 되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가끔 어디선가 누런 도화지 뭉치를 한가득 안고 돌아오셨다. 아마도 붓글씨와 맞바꾼 게 아닐까 싶다.
뭘 바꾸어서 가능한 것이 있다면, 난 바꿀 수 있는 게 참 많다.
종이들은 엄마가 사용하던 재봉틀 아래 선반에 쌓여 있었다. 누나들과 한 장씩 꺼내어 맘껏 사용했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아이였던 것 같다.
아껴 쓸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저 한 장씩 쏙쏙 뽑아 내 꿈을 그려내던 그 시절의 넉넉함이 떠오른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우리 막내누나가 읽고 있다면 울컥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은밀한 손 있어 그 난처하고 수치스러운 걸 덮어주었으니, 하면 나란 무엇인가?
세월은 어디에서나 흐르고 만날 수 있다 하였는데
어찌합니까, 저는 붙잡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거늘-
그때 같이 꺼내어 쓰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공유했고 서로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리고 김남조 시인의 글을 필사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다.
우리는 같이 늙어가고 있다.
또 하나 은밀한 손 있어
나의 난처하고 수치스러운 것을 가려 주었으니
아, 나란 무엇인가.
— 김남조, <정념의 기> 중에서
세월은 어디에서나 흐르고 만날 수 있다 하였는데 어찌합니까, 저는 붙잡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거늘...
—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써 내려갔던 우리의 문장인데 누구의 시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흰머리가 희끗한 어른이 되었다. 오늘 생각지도 못한 보물이 집으로 들어왔다.
택배 일을 하는 아내가 파손되어 반품된 A3 용지들을 잔뜩 챙겨 온 것이다.
A4보다 널찍한, 그 광활한 하얀 평면들을 마주하니 묘하게 가슴이 뛴다. 그래서 물었다.
여보?
우리 집에 당장 사용가능한 펜들이 뭐 있어?
뭐래. 아들이 썼던 볼펜이고 뭐고 저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단다.
이것저것 찾아본다.
뭐라도 그리고 싶고, 어떤 글이라도 써서 남기고 싶다. 누군가에겐 그저 파손된 종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다시 돌아온 나의 왕국이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떤 글을 써 내려가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아버지가 주셨던 누런 도화지가 이제는 아내가 가져온 하얀 A3가 되어 내 앞에 쌓여 있다.
나는 오늘 다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세상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뭘 그려볼까.
뭘 써볼까.
추억보단 건강한 미래다.
그림은 영 아니올시다니까, 짧은 문장이어도 그 안에 색감이 가득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