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작가는 그저 멍하니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것도 일을 하는 것이다.
단 한 줄을 못 써도 좋다. 조급해하지 마라. 그게 작가다.
지금 시간이...
아이고, 밥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어제 힘든 야근을 끝내고 베란다에 앉아 혼자 멍을 때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호랑이 마눌님이 신나게 택배송장 뽑아 붙이고 고객들 불만 상대하다가 잔뜩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와 함께 곧 퇴근해서 오실 시간인데 컴퓨터 앞에서 낑낑거리다가 하필 지금 막 발동이 걸렸다.
오늘은 집사람이 베란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자고 했었다. 냉장고를 보니 장도 다 봐두었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쓸 게 아니라 상추도 씻고 깻잎도 씻고 고추랑 마늘도 썰고 된장이랑 고추장도 준비하고 소금장도 만들고 밥도 하고 불판을 깔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글쓰기 발동이 걸려버려서 멈출 수가 없다.
작년 겨울이었다. 그날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아들에게 물어보고 있다. 12월 27일이란다.
아들이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여자 친구를 소개해 준다며 함께 집에 왔었다. 너무 기뻤다.
그래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했다. 그 친구가 닭요리를 좋아한다고 해서 한 번 제대로 해봤다. 홍합 칼국수도 준비했다. 오직 육수로만 승부했다. 육수는 내 정성이다. 간을 치면 더 맛이 살아날 것인데 건강한 맛을 선물하고 싶었다.
뭐, 아무튼 수줍은 미소로 우리 집을 찾아온 그 친구를 본 순간 난 활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예쁘고 귀한 사람이었다. 난 내 아들이 금의환향 했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여자 친구는 우리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는데 학생이라 뭘 준비해야 할까 고민의 고민 끝에 이렇게 준비했다면서 나에게 먼저 선물을 건네주었다. 포장지가 엄청 정성스러웠다. 과연 뭘까.
새의 선물이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작가님... 글 쓰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읽고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 책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책을 받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새의 선물. 난 이 책을 안다.
이 책은 내가 이 친구들 나이 때 한 번 쓱 읽고 지나간 책이다.
아주 사소한 씨앗과도 같은 친절과 관심 하나에도 그 상대방은 해처럼 인생전체의 빛을 꺼버리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버릴 수가 있다.
염세라고 해야 할까? 불안과 허무에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조금도 좋아해 주지 않는 그런 시절이었다.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내 젊은 시절에 이 문장은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었고 그게 누구든 함부로 사람을 대하면 안 된다는 철학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난 어른이다. 방황하는 청춘이 아니다. 성숙하고 현명한 어른이다. 가끔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래도 어른이다. 그것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리 잡고 잘 살고 있는 어른인지라 시선이 바뀐 것일까?
작은 새처럼 어느새 내 마음에 쏙 들어온 너무나도 예쁘고 귀한 친구는 책에 깔끔한 책갈피를 해두었는데 그 책갈피를 해둔 것도 내 맘에 쏙 들었다.
난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사면 그 책을 하나의 성물처럼 여기기 때문에 그대로 보고 그대로 둔다. 날카로운 선과 활자에 대한 중독이 있어서 본문을 보기 전에 앞 뒤 띠지의 글까지 하나하나 확인하며 좋아한다.
뭐 중요한 문장이랍시고 밑줄을 친다거나 페이지를 접는다면 그건 내 뼈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싫다. 그리고 난 그 누구에게도 내 책을 주지 않는다.
아무튼 지금 난 귀한 보석처럼, 예쁜 작은 새처럼 나에게 날아와 준 이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새의 선물은 모순이다.
내가 이 친구들 나이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열두 살, 이미 삶을 완성했다는 진희는 내 기억 속에 삶의 완성보다는 그냥 일찍 성장한 아이로만 인식되었었고 그렇게 기억되고 저장되었던 것 같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열두 살에 삶을 완성한다니! 이 또한 모순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이만큼 살아보고 이 책을 다시 펼쳐보니 삶을 완성한 아이가 맞는 것도 같다. 난 갈수록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그게 누구든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
그 빛나는 시기가 지나면 한 때 삶을 완성했을지라도 퇴화되고 그때 보이는 세상은 또 다르다. 지금 내가 다시 보이는 것처럼, 새의 선물은 어린 진희를 통한 어른들의 허무와 모순과 통찰 그리고 냉소로 가득하지만 지금 내 나이에서 보면 그저 모든 게 연민이다.
이제는 그 예쁘고 귀한 친구를 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아가가 책갈피를 해둔, 임작가님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그 12페이지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아가야.
난 말이야. 나에게 온 선물로 인해, 난 결코 내 빛을 잃거나 감옥 속으로 들어갈 일이 없는 아주 든든한 어른이란다.
또 한 번 초대하고 싶구나. 시간 날 때 보자. 우리 함께, 우리 앞에 펼쳐질 선물들을 천천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