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비밀
기무라란코는 아파트 반대편으로 돌아 걸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응급차 안으로 들어갔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고개 숙인 란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허, 반항하는 건가? 맛을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리겠군. 잡아 올려.”
남자는 우주복을 입고 있는 다섯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우주복차림의 남자들은 기무라란코를 붙잡아 수술대 위에 올렸다. 밖에서 보면 보통 응급차와 비슷했지만, 안의 시설은 수술실과 맞먹을 정도로 첨단장비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기무라란코는 수술대 위에서 온 몸이 제압당한 상태로, 이를 악물었다. 동그란 조명이 켜지자, 두려움에 떨리던 란코의 눈이 감겼다.
“호, 아직은 버틸 만한가 보구나.”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단추모양의 컨트롤러를 올렸다. 기무라란코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본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타스케테쿠다사이, 도오조, 도오조!(たすけてください, どうぞ, どうぞ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마쓰그! 소오써스떼이떼도기마쓰! 도오조! 도오조! 시나이데쿠다사이!(まっすぐにさせていただきます, どうぞ, どうぞ 똑바로 하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기무라란코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기무라란코여. 넌 조직의 소모품일 뿐. 이 단추를 끝까지 올리면, 네 머리는 펑! 하고 터져 버린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이, 하이! 아까리마쓰다!(はいはい, 分かりました, 네, 네! 압니다! 잘 압니다!)”
“허나, 너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지. 연구소의 놈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너와 접촉한 놈을 찾아야 할 것이야.”
“그, 그건…….”
“아, 아아……. 그게 끝이 아니지. 놈의 손가락도 모두 자를 거야. 피아노 치는 사람은 열손가락이 생명과도 같은 것. 놈은 피아노를 버렸지만, 기무라란코여……. 너는 그의 꿈을 버리지 못했지.”
기무라란코는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뇌 속에 잠복하고 있는 나노로봇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노로봇에는 폭탄이 심어져 있었다. 기무라란코는 자신의 머리가 터져 죽는 것보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최악으로 위소의 열 손가락이 잘리는 것은 정말 두려웠다.
“이 일이 끝나면, 지금 여기 수술대 위에서 네 머릿속의 폭탄을 제거해주고 자유를 주겠다.”
기무라란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만 흘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라. ‘게슈탈트’는 활동하는가? 활동하지 않는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트북으로 파일을 보낼 때와는 다른 말이었다.
“폭주가능성은 있는가? 없는가?”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좋다.”
남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는 ‘게슈탈트’를 터트리는 일만 남았군 그래. 오래 기다렸어.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어. 이거 벌써부터 짜릿해지는 걸?”
남자는 오줌을 싸고 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소가 들어왔을 때, 란코는 자고 있었다.
피아노 아래, 거실 바닥에 레고로 만들어진 글씨가 있었다.
하이, 위짱.
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주시겠습니까?
이 기무라란코에게 그런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위짱께서 연주를 해주시면, 이 기무라란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위소는 피아노 덮개를 열었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에서 만들어지는 무한의 곡.
그러나 이제는 버린 꿈. 전혀 다른 삶…….
위소는 새벽 3시를 향하고 있는 시계바늘을 보며, 덮개를 닫고 말았다.
피아노덮개를 쓰다듬으니, 아빠가 그리워졌다. 갑자기 표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일은 표관장에게 양복을 선물하고, 아빠에게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위소가 양복을 전해주자 표관장은 무척 기뻐했다.
“허, 살다보니 제자에게 양복선물도 받고. 고맙구나.”
“저, 아빠 묘에 좀 다녀올게요.”
“지금 말이냐?”
“네.”
“어디에 모셨는데?”
“예산추모공원이요.”
“거기 먼데? 함께 가자. 내가 데려다 주마.”
위소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혼자 갈게요.”
“기다려라. 근방 준비하고 나오마.”
표관장은 관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위소는 도장을 둘러보았다. 홍사범이 없는 도장은 썰렁했다. 홍사범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보고 있는데,
“위짜앙.”
하며 기무라란코가 불렀다.
“왜?”
“기무라란코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어디? 우리 아빠 묘에?”
“하이!”
그 때, 표관장이 나왔다.
“가자. 란코상도 가고 싶으면 따라오세요.”
“하이!”
기무라란코는 어디 놀러가는 것처럼 좋아서 뒤를 따라왔다.
예산추모공원.
납골당 오른 쪽에는 공동묘지들이 봉긋한 가슴처럼 오와 열을 맞춰 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세 사람은 탁위향의 묘 앞에 섰다.
여기는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죽은 자도 말이 없고, 산 자도 말이 없었다.
표관장은 탁위향의 묘 앞에서 정종을 따라주었다. 위소는 잔을 올리고, 절을 세 번 올렸다.
다음으로 표관장과 기무라란코가 함께 절을 올렸다.
절을 하고 일어나서 표관장이 물었다.
“위소야, 넌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가 누구를 위한 행위라고 생각 하냐? 여기 잠들어계시는 네 아버지를 위한 행위냐, 아니면 너를 위한 행위냐?”
위소는 곧장 대답했다.
“산자. 나를 위한 행위죠. 죽은 자 앞에서 산 자들이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는 행위. 그것이 바로 제사를 지내는 목적이니까요.”
표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위소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서,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산 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행위. 그것이 바로 제사의 목적이라는 것을.
위소는 표정의 변화 없이, 아버지의 묘와 할머니의 묘를 쓰다듬고 산을 내려왔다.
기무라란코는 위소를 따라 내려오며, 몇 번이고 뒤돌아 공동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곳이 너무도 무서웠다. 두 번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다.
세 사람이 도장에 돌아왔을 때 강일중이 수련생들을 원상폭격 시킨 상태로 죽도를 이용해 허벅지를 구타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 짓이야? 모두 일어서!”
표관장이 말하자 수련생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강일중! 들어와!”
강일중의 진짜 불만은 위소에게 밀리는 것이었다.
위소가 고정타격대 앞에서 ‘나선탄’을 수련하고 있을 때, 관장실안에서 강일중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솔직히, 섭섭합니다! 저 녀석에게 쏟는 정성 절반만 쏟아주어도 저희는 ‘나선탄’을 진즉에 완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표관장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관장님, 저희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누구는 체력담당전용코치까지 배정해주면서…….”
“그런 소리 할 거면 당장 그만두어라.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면 될 것 아니냐!”
강일중과 박태일은 표관장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알겠습니다. 떠나겠습니다.”
“야, 강일중?”
박태일은 일중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일중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위소를 보더니,
“잘해봐라.”
라며 짐을 싸서 나갔다. 박태일은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위소는 강일중이 자기 때문에 나선도장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싹이거늘, 왜 관장님께서 ‘나선검’을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일까, 의문이 갔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다는 것도 운명일까? 위소는 죽도를 잡고 다시 ‘나선탄’을 시전하려다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관장실을 뒤져보고 싶은 또 다른 위소가 있었다.
‘나선탄’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위소는 하루라도 빨리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나선탄’을 시전하려면, 자신의 뼈를 내주고 상대의 목숨을 가져와야 하는 그런 희생적인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기술이라고 하지만, 조금의 피해도 꺼려하며, 시전 할 수는 없었다. 위소는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위소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꼼짝 말고 도장에서 수련을 해야만 한다. 표관장은 한 번만 더 싸움질을 하고 다니면, 그 때는 정말 내칠 것이라며 열쇠를 복사해주었었다.
열쇠를 받을 때 박태일이 부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았었다. 박태일 역시 위소처럼 관장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